▲ 영화 <타짜>의 한 장면. |
수법마저 영화 <타짜>와 비슷했다. 영화 속에서 도박 설계자이자 꽃뱀인 정 마담(김혜수)은 한 예비역 장성이 돈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미인계로 접근해 골프장 등에서 만나다가 도박판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이 예비역 장성은 정 마담 일당에게 감쪽같이 속아 거액의 돈을 잃고 만다.
닮아도 너무 닮은 ‘꽃뱀 사기도박단’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
최아무개 씨(72)는 젊은 시절 주류도매업으로 돈을 모은 재력가다. 주변 지인들은 최 씨가 가진 재산이 100억대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골프와 바둑으로 여가를 보내던 최 씨는 경기도 성남의 한 기원에서 알게 된 이 아무개 씨(여·53)로부터 또 다른 이 아무개 씨(여·44)를 소개받는다. 광주 시내 한 식당에서 만난 그들은 28년이라는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 씨의 미모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함께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하며 내연관계로 발전했다.
사실 두 이 씨는 도박단의 유인책, 속칭 ‘꽃뱀’들이었다. 최 씨와 몇 차례 성관계를 가지며 완전히 넘어온 것으로 판단한 이 씨는 지난 8월 중순 경기도 양평 소재 한 식당에 마련된 하우스로 최 씨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최 씨는 이 씨의 권유로 1점에 1만 원인 고스톱 도박을 함께 했다. 이때 도박단은 ‘탄’ 카드를 사용했다.
탄이란 사기도박의 가장 흔한 기술 중 하나로 특정한 결과값이 나오도록 순서를 미리 설계해 둔 화투를 말한다. 화투에서의 탄은 선수들이 선을 잡았을 때 카드를 섞는 척하고 실제로는 섞지 않거나 또는 준비된 탄을 몰래 바꿔치기하는 수법을 이용한다. 이 도박단이 이용한 것은 미리 준비된 화투를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도박단은 최 씨에게 술을 먹이는 등 정신을 혼란케 한 후 탄으로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돈을 가로챘다. 한 판에 1200점이 나 1200만 원을 잃기도 했다. 일당은 최 씨에게 딴 돈을 꽁지를 통해 밖으로 빼돌렸다가 돈이 떨어진 최 씨에게 다시 빌려주는 방식으로 피해 금액을 키웠다. 최 씨가 이날 하루 동안 잃은 돈은 9000만 원이었다. 모두가 짜고 자신을 속였을 거라 전혀 의심하지 않은 최 씨는 이후에도 4차례나 더 도박장을 찾았다가 결국 5억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이 사기도박단은 2006년 6월부터 최근까지 최 씨를 포함한 40~70대 남성 재력가 5명을 상대로 17회에 걸쳐 10억여 원을 챙겼다.
지역 내 제보자를 통해 사기도박단에 관한 첩보를 입수한 양주경찰서 수사과는 피의자들이 쓴 자기앞수표와 휴대폰 위치 전송 등을 이용해 증거를 확보한 뒤 은신처를 잠복 수사한 끝에 이들 일당들을 검거했다. 결국 이 사기도박단은 지난 11월 3일 죄질이 무거운 총책 김 씨와 꽃뱀 이 씨를 포함한 4명이 구속되고 3명은 불구속됐다. 경찰은 또 달아난 선수 3명에 대해서 체포영장을 발부해 뒤를 쫓고 있다.
사기도박단의 총책인 김 씨의 범행 준비도 철저했다. 피해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김 씨는 동호회 활동 중 만난 프로골퍼와 찍은 사진을 이용해 친분이 있는 사이인 양 행세했다. 또 검거 후 유치장에 입감된 상태에서도 말을 맞추기 위해 메모지를 공범에게 전달하려다 압수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치밀함과 대범함으로 김 씨는 과거에도 사기도박으로 수차례 경찰조사를 받은 전례가 있었지만 한 차례도 구속되지 않았다.
도박단이 검거된 후 경찰 조사를 받은 피해자 최 씨는 처음에는 “이 씨(내연 관계)도 나와 같은 피해자”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뒤에야 이 씨의 실체를 알게 된 최 씨는 배신감과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다.
양주경찰서 강력3팀의 한 관계자는 “남자가 조심해야 하는 세 가지가 술, 도박 그리고 여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 사건은 이 세 가지 모두 엉켜 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라며 혀를 내둘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