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정부 기관장 69% 임기 1년 넘게 남아, 사퇴 종용 불법 불구 정부·여당 공개 압박…‘대통령 임기와 일치’ 법안 공감대
#윤석열 대통령 공공기관 혁신 강조
6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공공기관 평가를 엄격하게 하고, 방만하게 운영돼온 부분은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 공공기관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공공기관 부채는 지난 5년간 급증해 지난해 말 기준 583조 원에 이른다. 부채 급증에도 조직과 인력은 크게 늘었다”고 했다.
앞서 6월 20일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를 열고 ‘2021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결과 및 후속조치(안)’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기재부는 이번 평가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말에 확정된 ‘2021년도 경영평가편람’을 토대로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경영평가를 통해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기관장 교체에 나설 것이란 소문이 나돌자 이에 대한 해명으로 읽힌다.
공운위는 ‘아주미흡(E) 또는 2년 연속 미흡(D)’을 받은 8개 기관 중 현재 재임 중인 김경석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에 대해 해임을 건의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한 송찬식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상임이사(기획경영본부장)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송 이사는 지난해 3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고, 당해 5월 김경석 이사장이 선임되기 전까지 2개월간 경영을 책임졌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한국마사회,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나머지 7개 기관도 아주미흡(E) 또는 2년 연속 미흡(D)을 받았지만, 2021년 말 기준 재임 기간이 6개월 미만이거나 이미 임기가 만료돼 해임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흡(D)을 받은 15개 기관 중 6개월 이상 재임요건 등을 충족하는 LH 등의 기관장 3명에 대해선 경고 조치했다. LH가 내년에도 D 등급을 받는다면 김현준 LH 사장은 해임 건의 대상에 오른다.
김현준 사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국세청 조사국장으로 발탁돼 부동산투기 세무조사를 추진했다. 이후 서울지방국세청장, 국세청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나희승 코레일 사장은 2019년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제협력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에선 2003년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전문위원, 2004~2006년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회 수석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기환 한국마사회 회장은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 당시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사다.
공운위는 2021년 당기순손실이 발생한 11개 공기업에 대해선 기관장·감사·상임이사의 성과급 자율 반납을 권고했다. 대상은 강원랜드, 그랜드코리아레저, 대한석탄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인천항만공사, 주식회사 에스알, 한국공항공사, 한국마사회,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한국석유공사, 코레일이다.
김경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바 있다. 윤형중 한국공항공사 사장은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사이버정보비서관과 국가정보원 1차장을 역임했다. 원경환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서울지방경찰청장 출신으로 과거 민주당 입당 경력을 지녔다. 이백만 코바코 사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과 대통령 홍보특별보좌관 등을 지냈다.
#반복되는 낙하산
윤석열 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이 실질적 성과를 내려면 나눠먹기 식의 낙하산 인사를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통상 정권이 바뀌면 공공기관장은 스스로 사표를 내거나 그러도록 강요를 받아왔다. 이는 대통령과의 친소관계를 임용 기준으로 하는 ‘정실주의’와 정치적 이념, 정당 관계 등을 임용 기준으로 하는 ‘엽관주의’의 폐해다. 2022년 6월 기준 대통령이나 주무 장관이 기관장 임면권을 가진 공공기관은 부설기관(20개)을 포함해 총 370개이다. 공공기관은 공기업(36개), 준정부기관(94개), 기타공공기관(220개)으로 나뉜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5월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공기업 등 정부 산하기관장 인사와 관련해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사직을 압박한 셈이다.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서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대해 앞으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이전 정부 인사 ‘물갈이’를 노골적으로 단행했다.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청와대에 두 차례에 걸쳐 ‘인사를 자제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국무총리실은 23개 국책연구기관장에 전원 사표를 제출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전체 303개 공공기관장 중 119명이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1년 내 사퇴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논란으로 어수선하다. 지난 6월 7일 임명된 강석훈 신임 KDB산업은행 회장은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강석훈 회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후엔 정책특보로서 새 정부 경제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산업은행 노동조합이 ‘낙하산 회장 저지 투쟁’을 이어가면서 강 회장은 2주 만인 6월 21일 취임식을 열었다.
#버티면 뾰족한 수는?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5월 10일 기준 350개 공공기관의 상임 임원 임기 현황을 전수 조사한 결과 기관장 332명 중 231명(69.5%)의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특히 공기업 36개 가운데 임기 1년 이상 남은 기관장이 30명에 달한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4월 4일),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7월 8일), 황창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9월 30일) 등 3명의 임기는 올해 종료된다. 내년에는 박재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2월 27일), 최준욱 인천항만공사 사장(3월 17일), 김진숙 한국도로공사 사장(4월 9일) 등 3명이 물러난다. 나머지 27명은 2024년, 3명은 2025년에 임기 만료된다.
그러자 정부와 여당에선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등 공공기관장들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나섰다. 윤석열 정부는 두 위원장의 국무회의 참석까지 막았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6월 16일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나는 게 정치 도의상으로 맞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6월 20일 김용태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과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장을 겨냥해 “윤석열 정부와 국정철학도 방향성도 다르면서 굳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문재인 정권의 알박기 코드 인사로 임명됐던 분들은 이제 그만 스스로 물러나주시는 게 상식에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여권으로선 공공기관장들이 버틸 경우 뾰족한 방법은 없다. 전현희·한상혁 위원장도 중도 사퇴를 일축한 상황이다. 과거 정부에선 감사원이나 수사기관 등을 동원해 기관장들을 압박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무리하게 사직을 종용한다면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
지난 1월 대법원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5명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해 13명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유죄를 확정했다. 김 전 장관 등은 ‘새 정부 출범 후 산하 기관장에 대한 사표 제출 요구는 일종의 관행’이라는 취지로 해명했지만, 법원은 “법령에 위반되고 폐해도 심하여 타파돼야 할 관행”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사직을 요구하는 행위가 부처 장관, 청와대 비서관의 적법한 직무 범위를 벗어났다고 봤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공세도 만만치 않다. 6월 18일 조승현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체부 사직 강요사건’을 수사해 직권남용죄로 처벌받게 한 검사가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라며 “그랬던 분이 이제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서슴없이 사직을 강요하는가. 남이 하면 적폐이고, 본인이 하면 정의인가. 윤석열 식 정의와 공정의 실체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6월 15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윤석열 정부는) 본인들도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임기제 공무원을 알박기라고 비판하거나 그만둘 것을 종용하고 있지 않나. 이것도 블랙리스트 사건인가”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정권교체기마다 반복되는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법적 마련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6월 10일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이 공공기관장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일치시키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음 제21대 대통령 취임 때부터 공공기관장 임기와 연임 기간을 각각 2년 6개월로 하는 내용이 개정안에 담겼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김정우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새 정부 출범 시 기존 공공기관장의 임기가 만료된 것으로 간주하는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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