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O 규약에 따르면, FA 자격을 갖추지 않은 선수는 구단과 다년계약을 할 수 없다. SK는 박경완과 2년 계약을 맺었지만 KBO에는 1년 계약서만 제출하며 ‘관행대로’ 이면계약을 맺어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발단은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발표였다. 11월 5일 KBO는 FA 자격 취득 선수 2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SK 박경완이었다. 기자들은 깜짝 놀라며 “박경완이 FA 대상자냐”고 KBO에 문의했다. 그도 그럴 게 1월 16일 SK는 ‘박경완과 2년간 계약금 4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14억 원에 계약했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발표대로라면 박경완은 계약기간이 1년 남아 있다. 그러니, FA 대상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KBO는 “박경완은 명백한 FA 대상자”라며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SK는 “박경완은 틀림없는 우리 선수”라며 “KBO의 FA 공시는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경완의 입장은 더 난처했다. 생각지도 못한 FA 자격을 취득했으나, 기존 계약을 무효로 하고 FA를 신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박경완 사태는 왜 벌어진 것일까. SK가 규약을 어기고, KBO가 구단들의 편법 계약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 재활은 SK, 경기는 다른팀?
“일등 공신은 박경완이다.” 지난해 SK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했을 때다. 김성근 SK 감독은 박경완을 가리켜 “팀 전력의 절반”이라고 극찬했다.
SK는 연봉 인상으로 박경완의 노력을 치하하고자 했다. 하지만, 박경완의 건강이 걸림돌이었다. 2010년 아킬레스건 수술을 받았던 박경완은 오른 발목이 정상적이지 못했다. SK는 박경완이 부상 후유증으로 2011시즌 참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건강이 회복되는 2012년엔 박경완이 다른 팀에서 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 박경완이 2011시즌 종료와 함께 FA로 풀리기 때문이었다.
자칫 재활은 SK에서 하고, 경기는 다른 팀에서 뛰는 ‘애매한 상황’을 염려한 SK는 결국 박경완에 2년 계약을 제안했다. SK 관계자는 “당시 마흔 살이던 박경완의 나이를 고려해 3년 이상의 장기계약은 위험할 수 있어 2년 계약을 제시했다”며 “선수 본인도 흔쾌히 구단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SK는 계약 체결과 함께 보도자료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SK와 박경완의 2년 계약은 KBO 야구규약을 어기는 엄연한 불법 계약이었다. 현행 야구규약은 FA 계약을 제외한 다년 계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계약은 1년마다 갱신하도록 명문화했다.
KBO 이상일 사무총장은 “비 FA 선수들마저 다년 계약을 허용하면 구단들이 FA 자격 취득 전에 선수들과 다년계약을 맺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만약 이런 식의 변칙적인 입도선매가 인정된다면 선수 권리보장과 구단 간 전력평준화를 위해 도입된 FA 제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야구계 전체에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며 단년계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SK도 KBO의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KBO엔 1년짜리 계약서를 보냈고, 박경완과는 2년짜리 이면 계약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알 리 없는 KBO는 1년짜리 계약서를 토대로 박경완을 FA 대상자로 발표했다.
규정을 어기고 이면 계약을 작성했으니 SK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SK는 되레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다른 구단들도 관행적으로 우리처럼 이면계약서를 작성하고, KBO에 보고할 때 1년짜리 계약서를 보낸다. 더군다나 우리는 박경완과 2년 계약했다는 사실을 보도자료를 통해 알렸다. 규약을 어긴 건 잘못했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속인 적은 없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의 계약이 잘못됐다면 왜 그때 KBO가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관행에 따랐을 뿐이고, 정작 책임은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KBO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KBO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반응이다. KBO 핵심 관계자는 “우리는 SK가 제출한 1년짜리 계약서를 토대로 박경완에 FA 자격을 부여했다. SK가 KBO의 관리 감독 소홀을 탓한다면, 그럼 ‘우리가 이면계약서까지 추적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처음부터 SK가 정직하게 계약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며 “박경완의 FA 자격 철회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한 가운데 공은 박경완에게 넘어갔다. 야구계는 “박경완이 FA를 신청하면 SK는 희대의 바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박경완은 “SK와의 2년 계약을 존중한다. 내년시즌에도 SK 유니폼을 입을 것”이라고 밝히며 끝내 FA를 신청하지 않았다.
# 편법계약 판치는 야구판
한국 야구계에서 편법 계약은 관행으로 불린다. 그만큼 일상적이라는 의미다. 대표적인 예가 국내로 복귀하는 해외파 선수들의 계약이다.
지난해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다가 LG로 돌아온 이병규는 계약금 1억 원, 연봉 4억 원에 2년 계약을 맺었다. 1년 계약을 원칙으로 하는 야구규약을 엄연히 위배한 편법 계약이었다. 규약대로라면 KBO는 LG에 500만 원의 제재금을 물리고, 구단 임직원의 직무를 2년간 정지시켜야 했다. 하지만 KBO는 “앞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구두 경고 조차하지 않았다. KBO의 침묵 속에 국내 복귀 해외파 선수들의 다년계약은 이제 일상이 됐다.
최근 한화가 “규약 준수 차원에서 김태균과 1년 계약을 맺겠다”고 발표했을 때 야구계가 코웃음을 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 선수들의 FA 신청을 뜯어말리던 구단들이 최근 들어선 적극 권장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11월 22일 처음 시행되는 2차 드래프트 때문이다.
2차 드래프트는 미 메이저리그의 ‘룰5 드래프트’를 본뜬 것으로, 각 구단에서 제출한 보호선수 45명을 제외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최대 3억 원의 트레이드 머니만 지급하면 다른 팀에서 해당 선수를 영입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유망주가 풍부한 팀은 다른 팀에 좋은 선수를 뺏길 수 있어 45명의 보호선수 명단을 짜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제는 45명 보호선수 가운데 FA 신청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구단이 보호할 수 있는 선수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구단들은 선수들에게 은근히 FA 신청을 종용하고 있다. 모 선수는 “구단의 꼼수가 숨어 있다”라고 귀띔했다.
“‘내가 과연 FA를 신청하면 어느 구단에서 날 데려가겠나’ 싶어 FA 신청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구단이 FA를 신청을 권유했다. 이유인즉슨 45명 보호선수 안에서 나를 빼기 위해서였다. ‘그럼 다른 FA 선수들처럼 다년계약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 1년 계약뿐이다’였다. 구단의 행태가 얄미워 결국 FA 신청을 포기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 지난 10일 대전역 회의실에서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긴급이사회가 열려 각 구단 대표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가졌다. 뉴시스 |
파이 커지니까 파열음도 커져?
선수들이 하나가 되자고 뭉친 선수협이 11년 만에 선수들의 편을 가르는 이전투구장이 됐다.” 전 삼성 투수 박충식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는 11년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회장 손민한) 태동을 이끈 주역이었다. 하지만, 최근 선수협이 내분에 시달리는 걸 보며 착잡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발단은 선수협 사무총장 K 씨의 비리 혐의에서 출발한다. 검찰은 ‘지난 4월 온라인 게임개발업체로부터 선수들의 초상사용권 독점 사용에 대한 청탁과 함께 25억 원을 받았다’며 K 씨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특히나 검찰은 ‘K 씨가 25억 원 가운데 상당액을 개인적 용도로 쓰는 등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K 씨는 “검찰이 게임사와 브로커의 일방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며 “브로커에 돈을 빌린 적은 있으나, 25억 원 상당의 금액을 받은 적은 절대 없다”고 항변했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 속에 법원은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현재 K 씨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K 씨와 손민한 회장을 지지하는 선수들은 “재판 결과를 보고 K 씨의 사퇴 여부를 결정하자”는 주장이다. 모 선수는 “K 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수협 위상이 많이 올라간 게 사실”이라며 “법원이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도 K 씨 입장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선수는 손 회장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할 건 책임져야 하지만, K 씨 문제까지 손 회장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현 지도부를 반대하는 선수들의 입장은 다르다. 지방팀의 모 선수는 “당장 K 씨와 손 회장은 선수협 내분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기록을 본 적이 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K 씨의 비리액수가 컸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지만, 그건 ‘도주 위험이 없다’는 이유였지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K 씨가 브로커에게 돈을 빌렸고, 게임사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만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무총장 해임 사유가 된다. 손 회장 역시 K 씨 비리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게 바람직하다.”
K 씨는 법정에 섰지만, 사무총장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K 씨는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손 회장이 ‘지금 사퇴하면 총장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만류해 재판이 끝난 다음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다”며 “스스로 떳떳하기에 현재 차질없이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수협의 위상이 추락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다 야구계 현안마다 자기 목소리를 냈던 선수협은 K 씨에 대한 검찰수사가 시작되면서 침묵을 지켰다. 야구장에서 발암물질인 석면이 검출됐을 때 선수들이 “어째서 선수협이 침묵하고 있느냐”며 분통을 터트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수협의 침묵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선수협 집행부를 둘러싼 각종 소문과 억측이 불길처럼 번졌다. 이때 휘발유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강병규였다.
강병규는 트위터를 통해 선수협 지도부를 맹비난하며, K 씨와 손 회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선수협 집행부의 비리 혐의를 잘 알지 못하던 야구인과 야구팬은 강병규의 트위터를 보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강병규는 과거 선수협 태동에 앞장섰던 은퇴 선수들을 만나 “이대로 선수협을 둬선 안 된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반년간 잠잠했던 K 씨 사건은 10월 말 선수협 태동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이며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은퇴 선수들은 “선수협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에 합의하며 K 씨에 사퇴를 권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은퇴 선수들이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현역 선수들이 직접 집행부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유했다.
현역 선수들은 10월 31일 서울역의 한 식당에서 모여 선수협 사태를 논의했다. 그리고 11월 10일 8개 구단 대표 선수들이 대전역사 2층 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은 “일련의 좋지 않은 일로 선수협의 이미지가 상당히 손상됐다”며 선수협 이미지 제고를 위해 애쓰기로 합의했다. 선수 대표들은 “검찰 측 자료만으로 현 집행부의 해임을 결정하기 어렵다”며 “K 씨와 손 회장을 만나 직접 해명을 듣고서 해임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현 선수협 집행부는 구단 대표 선수들을 상대로 적절한 해명을 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편으론 자신들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이들과 전면전을 선언했다. 선수협은 11월 9일 보도자료를 통해 ‘나진균 선수협 전 사무총장이 각 구단 고참 선수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K 씨의 검찰 수사기록을 배포하며 K 씨가 선수협의 돈을 횡령하였고, 초상사용권 사용 대가로 수십억 원을 지급받아 유죄가 확실하다는 악의적 헛소문을 퍼트렸다’며 ‘나 씨를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나 씨는 “고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며 “K 씨가 ‘나진균이 사무총장 때 선수협 돈을 횡령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녀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반박했다. 나 씨는 선수협이 자신을 고소하면 K 씨를 맞고소할 계획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집행부 반대파의 거듭된 사퇴 요구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선수협 집행부가 어째서 11월 들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모 야구인은 “11월 중순에 K 씨의 재판이 예정돼 있다”고 귀띔했다. 이 야구인은 “재판 전 해임되면 판결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K 씨의 생각으로 안다”며 “K 씨가 최대한 결심재판 때까지 사무총장직을 유지하려면 반대파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모 야구인은 “K 씨가 사퇴해도 걱정”이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항간엔 전 단장 출신의 모 야구인과 연예인 출신의 모 인사가 사무총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두 사람 모두 결격사유가 명백한 이들이다. 선수협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한 이유다.”
K 씨의 결심재판은 다음해 2월에 열릴 예정이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