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그때 그 사건’
전창진 감독과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꺼낸 질문이 ‘그때 그 사건’이었다. 기자들 앞에선 가급적 그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 했던 전 감독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문을 연다.
“결국엔 내가 옹졸한 놈이 된 셈이다. 겉으론 모든 걸 다 수용하는 사람인 척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가벗은 날 보여준 것이다. 당시 4차전에서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1차전서부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걸 여기서 나열하기는 곤란하다. 가장 아낀다는 후배 감독과 치열한 승부를 벌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보였고, 그 일 이후로 나 또한 시련의 나날을 보냈다. 내가 감독을 왜 하고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난 후배 감독들이랑 싸워야 하는 현실과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왠지 냉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후배들과도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결심이 생기더라. 승부의 세계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돼선 안 되는 거였다.”
강동희 감독도 이 일에 대해선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막상 승부의 세계에 들어서보니 밖에선 호형호제하다가도 코트에 들어서면 이기고 싶은 승부욕이 발생한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됐던 게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4강전이었다. 난 충분히 전 감독님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시간이 흘러서 내 밑에 후배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다 내가 고참 지도자가 되어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나 또한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코트에선 뜨겁게 승리를 위해 싸우다가도 경기 후 밖에선 감정의 앙금 없이 편하게 만나고 싶었다. 그 일 이후로 전 감독님도, 나도 많은 경험과 배움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강 감독은 전 감독이 원주 동부를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솔직히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컸었다고 고백한다. 4년 동안 전 감독 밑에서 생활하며 나름 배운 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전 감독의 그늘이라 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지할 수 있는 ‘형’이 없다는 게 강 감독한테는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 지난 10일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KT 대 동부 경기에서 전창진 감독과 강동희 감독이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난 TG삼보 시절에 우연한 기회에 감독이 된 케이스였다. 내가 감독을 맡을 당시의 팀 사정은 최악이었다. 더욱이 농구계에선 전창진이 감독을 한다니까 비웃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감독은 아무나 하는 거냐’며 브레이크를 거는 농구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원주에서는 팀도 살리고 나도 지도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죽기살기로 들이댔던 것 같다.”
‘명장’ ‘지장’ 등의 타이틀을 안고 만년 하위팀인 부산을 2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전 감독. 이전에는 선배들을 상대로 도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후배들의 도전에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처음 감독할 때 내 앞의 산은 신선우 감독님이셨다. 그 큰 산을 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나름 잘 넘어왔었다. 그러다 후배들을 상대로 게임을 벌이면서 지면 창피한 것이고 이기면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김진 선배가 이끄는 LG를 맞아 기를 쓰고 이기려 덤빈 적이 있었다. LG가 6연패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 또한 한 게임 승부에 순위가 뒤바뀌는 처지라 이겨야만 했고 결국엔 이겼다. 그러나 경기 후 돌아서면서 찜찜한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되더라. 경기가 치열하게 물고 물리면서 심판 판정에 항의한다고 양복저고리를 벗어 던지며 흥분했던 장면을 떠올리니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김진 선배한테 죄송했다. 아마 진이 형도 나로 인해 순간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나도 후배들이 그랬을 때는 상처를 받았으니까.”
강 감독은 한 팀을 이끄는 리더의 입장에서 친한 감독들과의 승부를 앞두고 있을 때 선수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이 쓰인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허재, 전창진 감독과 내가 어떤 사이라는 걸 선수들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형님’들과의 경기라고 해서 주눅이 들거나 제대로 팀 운영을 하지 않거나 심판한테 어필하지 못한다면 선수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이 될 때도 있었다. 나이가 어려서 힘든 게 바로 이런 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난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전 감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초보 감독, 미천한 경력의 지도자가 범할 수 있는 우를 피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벤치에서의 기 싸움
강 감독은 허재, 유재학 감독을 만나 승부를 벌일 때도 힘들지만, 가장 어려운 상대는 바로 전 감독이 이끄는 부산KT라고 말한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더 힘들 수도 있다. 내가 4년 동안 전 감독님 밑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동부 감독이 된 이후 그대로 써먹고 있는 중이다. (감독 부임) 3년차가 된 지금은 전 감독님의 색깔보다는 내 색깔을 덧입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기본은 어쩔 수가 없다. 전 감독님한테서 나왔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상대하기가 벅차다.”
전 감독은 기 싸움과 관련된 질문을 듣고 “동희랑 무슨 기 싸움을 하겠느냐”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동희는 겉으론 털털해 보이지만 마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굉장히 꼼꼼한 면이 있어서 항상 긴장감을 갖고 경기에 임한다. 후배가 좋은 지도자로 성장하는 것 같아 흐뭇할 때가 많다. 나한테 들이댈 때만 빼놓고(웃음).”
# 막말 파문
전 감독은 최근 찰스 로드를 향한 막말 논란으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한 인터넷 매체에서 그걸 문제 삼아 기사를 올리자, 다른 언론에서도 너도 나도 그 내용을 화제성으로 다뤘다. 이 일로 인해 전 감독은 또 다시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잠시 기자들한테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그러면서도 억울했다(웃음). 찰스 로드는 5만 불짜리 선수가 아니다. 그런 선수를 5만 불짜리 선수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그가 힘들게 뛴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경제적인 풍요로움도 갖게 하려고 코트 안에선 다그치고 코트 밖에선 따뜻하게 감싸줬다. 선수들한테 농구는 삶이고 전부다. 나 또한 이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쫓겨나지 않고 선수들을 가르칠 수 있다. 삶이고 전부인 코트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에서 강하게 다그치기도 하고 욕도 하는데, 사람들은 TV를 통해 비쳐진 모습만이 전부인 줄 알더라.”
이 문제에 대해선 오히려 강 감독이 더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아는 전 감독님은 사전에 선수들과 충분한 교감을 이룬다”면서 “그 교감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비난도 하고 욕도 하며 선수들을 집중시키기 때문에 선수들이 믿고 따르는 것”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분은 진심으로 선수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그걸 코트 밖에선 가감없이 보여준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부모님, 아내, 심지어 여자친구까지 챙기시는 분이다. 선수들은 누구보다 전 감독님의 마음을 잘 읽고 있고, 그걸 이해하기 때문에 코트에서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수긍하고 따른다. 만약 그런 교감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찰스 로드는 이전에 팀을 뛰쳐나갔어야 했다. 이번 일이 불거졌을 때 누구보다 선수들이 전 감독님을 감싸는 모습을 보고, 나도 느낀 바가 크다. 내가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 그리고 승부
두 감독 모두 올 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조금은 다르다. 강동희 감독은 1위를 달리고 있는 만큼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쥔 후 챔프전을 치르고 싶어 하고 전 감독은 정규리그 우승보다는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가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즉 지난해처럼 정규리그 우승에 올인하다가 정작 플레이오프 때 체력이 고갈돼 제대로 뛸 수 없는 과오를 또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전 감독은 “정규리그 우승을 해봤으니 이젠 챔프전에서 우승을 하는 게 목표다”라고 말하면서 “챔프전 맞상대로 KCC, 동부 두 팀 중 어느 팀이 올라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강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
“올 시즌은 무조건 정규리그 우승으로 직행하는 게 제일 큰 목표다. 지난 시즌 허재 형이랑 붙어봐서 올 시즌에는 전 감독님이랑 챔프전에서 대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정말 멋진 대결을 펼칠 자신이 있다.”
챔피언결정전에 대한 얘기를 하던 강 감독이 전 감독에게 지면을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내용이 재미있다.
“형! 이럴 때 형이라고 부르지, 언제 형이라고 부르겠어요. 형이 동부를 떠나면서 저한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코트에선 무조건 나를 이겨달라’는 말. 전 형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래야 형도 더 보람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해요. 허재 형이 들으면 서운해 할지 모르지만, 전 형과 챔프전에서 붙고 싶어요. 이러다 둘 다 떨어지면 제대로 망신이겠죠(웃음)?”
그분의 욕은 왠지 달달해ㅋㅋ
“코트에서만 그렇지 코트 밖에선 한없이 자상하고 정이 많은 분이에요. 성적이 좋은 선수라고 해서 특별대우해주지도 않아요. 12명 모두에게 똑같이 관심을 나타내시면서 애정을 보이시죠. 훈련할 때나 경기할 때 야단을 맞는다고 해서 다른 생각을 갖는다면 그건 프로가 아니에요. 전, 감독님이 욕을 해주셔야 마음이 편해요(웃음). 찰스 로드 막말 파문으로 감독님 말수가 부쩍 줄어드셔서 걱정입니다.”
조성민은 자신의 농구 인생을 “전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슈터였지만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다가 전 감독 부임 후 조성민은 물 만난 고기처럼 빠른 성장 속도를 내달렸던 것이다.
“찰스 로드가 그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감독님한테 안기는 모습을 볼 땐 웃음이 나요. 자신이 쫓겨날 위기에 처한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감독님을 이해하려고 해요. 외국인 선수가 그 정도면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어떻게 하시는지, 잘 알 수 있는 거죠.”
전 감독은 조성민이 아시아선수권대회 차 대표팀에 합류했다가 소속팀으로 돌아와선 자신한테 배웠던 기량을 많이 까먹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스타플레이어도 아닌데 마치 스타가 된 것처럼 겉멋이 들었다고 화도 냈다. 조성민은 이에 대해 수긍한다는 표정이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지도 모르죠. 그럴 때마다 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신대요. 성민이 좀 잘 잡아주라고. 곧 결혼할 사이라서 더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아요. 올 시즌, 감독님의 바람대로 ‘뻘짓’ 안 하고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싶어요. 우승컵을 품에 안으시면 정말 활짝 웃으실 텐데 말이죠(웃음).”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