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인 모를 팔꿈치 통증으로 2년간 방황했던 백차승이 드디어 ‘통증’을 잡고 ‘취업’에 성공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뛰게된 그는 일본에서 인정받아 다시 빅리그로 돌아가겠다는 굳은 각오를 보여줬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백차승은 한마디로 사연이 많은 남자다. 뭐든지 쉽게 가는 법이 없다. 미국을 건너가는 과정도, 미국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 순간도, 또 거기에 발 딛고 정착하기까지의 시간도, 순조롭지 않았다. 똬리처럼 틀고 앉아 사라지지 않았던 팔꿈치 통증으로 결국엔 샌디에이고에서 방출된 이후에도, 그리고 팔꿈치 재활과 미국 독립리그와 베네수엘라 윈터리그까지 오가는 단계에서도 그는 매번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그의 한 많은 인생이 정리된 시점은 2010년 12월 말, 그를 괴롭혔던 병명이 밝혀지고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오랜 시간 팔꿈치 통증에 시달려왔다. 샌디에이고에서 방출된 이유도 그 부상 때문이었다. 구단에선 인대 수술을 받으라고 권유까지 했었지만 수술 이후의 후유증과 복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술을 미루고 재활에 집중했었다. 그 통증은 참으로 날, 내 존재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면 통증이 재발하고 피칭을 하지 않으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즌 초반 시애틀 트라이아웃에 참가해서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그 팔꿈치 부상 이력이 메디컬 리포트에 남아 있는 바람에 계약이 무산된 일도 있었다. 날 오랫동안 괴롭히며 야구 인생을 힘들게 했던 그 부상은 나중에 일본에서야 원인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백차승은 지난해 11월, 일본 돗토리현의 재활센터에서 연수 중인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어차피 재활하는 거라면 돗토리의 전문 재활센터에서 재활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체계적인 재활 프로그램을 받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재활을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일본의 한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게 되었다. 그 병원은 일본의 유명한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가 수술을 받은 곳이었고 워낙 명성이 자자해 외국인이 진찰을 받으려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도움을 주신 분이 요코하마 고등학교의 와타나베 감독님이셨다. 그 감독님과는 부산고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돌아가신 조성옥 감독님과 친분이 두터웠고 서로 교류하며 훈련과 경기를 했었기 때문에 그 감독님도 나를 잘 알고 계셨다. 친구로부터 내 사정을 전해 들은 와타나베 감독님이 친분이 있던 그 병원 관계자에게 얘기를 해서 정밀검진을 받게끔 힘을 써주셨다. 그런데 정밀검진 결과,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었다. 즉, 그동안 날 괴롭혔던 통증이 뼛조각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전문기자 |
“정말 이상했다. 미국에선 발견되지 않았던 뼛조각이 왜 일본에서 발견됐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친구의 조언으로 일본을 찾지 않았고, 거기서 정밀검진을 받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재활에만 매달리면서 통증 없이 공을 던질 수 있는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 오릭스 입단 자체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12월 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백차승. 수술 이후에는 일본 돗토리현과 부산 동의대에서 재활 훈련에 매진했고, 잘 알려진 대로 지난 11월 6일 오릭스의 마무리 캠프가 열리고 있는 일본 고치에 들어가 입단 테스트를 받자마자 합격 통보를 받고 무려 5억 8000만 원이나 되는 몸값으로 1년 계약을 맺게 되었다.
“지난 시즌 미국 독립리그와 윈터리그를 떠돌면서 수차례 야구를 포기할 뻔했었다. 뼛조각 수술을 받기 전까지 미국에서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원인을 알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날 옥죄었던 통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수술까지 받고 나자, 재활에만 몰두하면 재기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이 생기더라. 올 시즌 중반에 미국 메이저리그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몸이 온전한 상태도 아니고, 오랫동안 공을 던지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시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2012년 준비에 돌입하는 와중에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오릭스 입단 테스트를 권유받게 된 것이다.”
11월 6일, 오릭스의 고치 캠프에 합류한 백차승. 오랜만에 팀 훈련에 참가한 그로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백차승에 대한 구단의 관심이 예상 외로 대단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내가 처음으로 불펜 투구하는 날, 오릭스 단장, 감독, 코치,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이 대거 현장으로 나오셔서 날 지켜보셨다. 그들한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해 던졌다(웃음). 합격해야 직장이 생기는 것이고, 만약 떨어질 경우 또 다른 팀을 전전하며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탓에 무조건 열심히 던졌던 것 같다. 그런데 느낌이 좋았다. 팔꿈치에 통증이 없으니까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더라. 특히 2년 넘게 팀 훈련을 그리워하다 너무나 오랜만에 선수들과 함께 뛰고 던지고 웃고 즐기는 생활을 하다 보니 없던 에너지가 생기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첫 불펜 투구에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백차승은 시간이 흐를수록 스피드가 올라가고 제구력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오릭스에서 흘러나오는 평가도 기대 이상이라 점차 자신감도 상승됐다. 14일까지 테스트 기간이 예정돼 있었으나 첫 불펜 피칭으로 더 이상 테스트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 마디로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기뻤다. 계약 조건도 내가 요구하는 대로 다 맞춰줬다. 자칫 헐값에 계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릭스에서 내 자존심을 세워줬다. 오릭스 측에 감사했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관심을 놓지 않고 이끌어준 지인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다시 팀을 찾게 된 바탕에는 지인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난 다 차려 놓은 밥상에서 숟가락만 들었을 뿐이다. 항상 외롭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내가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차승에게 ‘만약’이란 단어를 제시하며 FA로 풀린 이대호와 오릭스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냐고 물었다. 백차승은 “같은 부산 출신이고, 고등학교 시절 부산고와 경남고가 맞붙을 때 상대했던 선수라 친근감이 있다”면서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와 한 팀에서 생활한다면 나한테는 영광이고 서로 의지가 많이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1998년 미국 시애틀에 입단 후 부상과 재활로 점철되었던 백차승의 야구 인생.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보낸 시간보다 재기를 위해 마운드 밖에서 절치부심한 흔적들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그의 미국 야구는 이렇게 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백차승은 단호한 표정으로 “결코 나의 미국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오릭스와 1년 계약을 맺은 건 일본에서 보란 듯이 재기해서 다시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상만 없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아직 내 나이가 서른한 살이고, 오랜동안 팔을 쓰지 않은 터라 나름 싱싱하다(웃음). 일본에서 인정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백차승이 부상으로 오랜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를 지켜주고 응원해 준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여자친구다. 그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백차승은 “내가 가장 힘들 때 만나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함께 겪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내 옆을 지켜줘서 고맙다. 그 친구를 위해서도 난 마운드에서 제대로 일어서야 한다”며 감정을 드러낸다.
부산=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