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신문방송 교차겸영을 허용한 영국 커뮤니케이션법의 최대 수혜자는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이었다. 국내 종합편성채널 개국과 관련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은 머독이 지난 2008년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모습. epa/연합뉴스 |
교차겸영을 핵심 조항으로 한 미디어관계법은 영국의 ‘커뮤니케이션법’을 떠올리게 한다. 2003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커뮤니케이션법은 세계화 시대에 맞춰 언론 시장의 확장을 목표로 했지만, 그 핵심은 사실상 교차겸영이었다.
지상파에 투자 자체를 봉쇄한 미디어관계법에 견주었을 때 커뮤니케이션법은 교차겸영의 폭이 더욱 넓다. 커뮤니케이션법은 케이블방송은 물론 지상파 민영방송 ITV에 한해 신문 투자를 최대 20%까지 허용한다. 기본적으로 영국의 커뮤니케이션법은 최소한의 규제를 하는데, 이는 시장의 논리에 최대한 충실히 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법의 최대 수혜자는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이다. 머독이 대표로 있는 뉴스인터내셔널은 정론지를 표방하는 더타임스와 선데이타임스,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지 선 등을 소유하고 있다. 뉴스인터내셔널이 소유한 신문들은 영국 신문시장의 약 37%를 점유하고 있는데, 논조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국판 ‘조·중·동’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커뮤니케이션법에 따라 머독이 최대주주로 있는 위성방송 BSKYB는 ITV의 지분 17.9%를 소유한다.
그러나 견제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뉴스인터내셔널의 라이벌 기업인 버진미디어가 뉴스인터내셔널을 상대로 불공정한 거래를 했다며 고발했다. 영국 정치권에선 머독이 실제적으로 소유한 ITV의 지분을 7.9%까지 깎아내리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현재 머독의 위상을 감안할 때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많다.
영국 정치인들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머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선거 때만 되면 머독 소유의 신문들은 특정 정당을 지지해 여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지난 2009년 총선 당시, 머독 소유의 선은 노동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1면에 실었다. 결국 노동당은 12년의 장기 집권을 마치고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들어선다. 불황이 계속되고 연립정부가 공공지출 삭감 정책으로 복지를 축소해도 여전히 민심을 얻는 까닭은 머독 소유 신문들이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지난 7월엔 머독 소유의 주말신문인 뉴스오브더월드가 배우 휴 그랜트 등을 전화 해킹한 사실이 밝혀져 폐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뉴스오브더월드의 기자들은 영국 경찰 등을 매수해 유명 인사를 전방위로 해킹했지만, 머독의 영향력 없이 과연 경찰들이 협조했겠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해킹을 지시한 편집장이 구속되는 등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영국 내 머독의 위상이 흔들림 없는 건 그만큼 영향력 있는 언론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리고 머독의 힘을 지탱하는 건 신문 이외에도 영국 유료 채널 중 가장 많은 시청자를 보유한 BSKYB가 있다. 해킹 파문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100% 인수를 포기한다고 했지만, 이미 최대 주주로서 실제적 소유자이기도 하다. BSKYB의 회장은 머독의 차남 제임스 머독이다.
교차겸영의 최대 효과로 일자리 창출을 꼽는다. 교차겸영에 따라 새로운 방송이 생긴다면 그만큼 언론인 지망생들을 많이 채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를 보면 사실이라 할 수 없다. 2009년 ITV는 자사 기자 등을 대상으로 정리해고를 감행했다. 경제 위기에 따른 결과였지만, 교차겸영이 막연히 부의 팽창과 일자리 창출을 가져온다는 논리와 배치되는 풍경이었다. 대기업의 방송산업 진출은 인수합병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보다 구조조정이 일어난다는 우려가 들어맞은 것이다.
무엇보다 방송의 질적 수준에 대한 우려가 있다. 머독이 개입한 후부터 ITV가 상업화되었다는 얘기가 많다. 데스 프리드먼 골드스미스대학 교수(미디어학)는 <일요신문>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교차겸영으로 인해) ITV에서 다큐멘터리 등 공익성 프로그램이 대거 사라지는 대신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중계 등 시청률을 지향하는 방송들이 증가했다”며 “시청률에서 밀린 공영방송은 물론 케이블TV까지 선정적인 장면이 난무하는 상업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영국 전문가들이 교차겸영을 우려한 이유는 신문과 방송의 차이 때문이다.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방송은 활자보다 현실성이 뚜렷하다. 또 신문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보수든 진보든 이념적 성향을 갖는다. 공영방송 채널4의 PD 아키 아헤드는 “교차겸영은 세계적인 추세다. 아직까지는 교차겸영에 따른 폐해가 많았지만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 등 효과는 곧 나올 수 있다”라고 하면서도 “방송은 신문에 비해 사람들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가는데, 신문의 논조가 방송으로 이어질 경우 이념적 독점 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경제위기가 심화될 경우 교차겸영의 폭은 더욱 넓어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 재정 위기를 겪는 채널4에 대한 민영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많다. 민영화가 될 경우, 채널4에 대한 교차겸영도 가능하다. 영국에서 채널4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 가운데 머독이 속한다.
이안 버렐 인디펜던트 기자는 신문이 케이블의 지분을 소유하는 건 허하돼 지상파에 진출하는 건 반대했다. 한마디로 머독이 ITV의 지분을 갖는 것에 반대한 셈이다. 이안 기자는 “교차겸영은 현재까지도 논란을 부르는 흥미로운 소재지만 방송이 아무리 상업적이라고 해도 신문과 비교하면 덜 정치적이다. 신문이 지상파에 진출하면 지상파 방송의 정치적 논조는 한쪽으로 치우친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 연대 대표 윌리엄스는 “(교차겸영은) 돈 많은 신문사 사주가 언론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팀 크룩 골드스미스대교수(미디어법)는 “디지털 시대에 맞추어 미디어 환경이 변하고 있는데 교차겸영은 변화된 환경에 부응하는 핵심이다. 교차겸영은 시대적 요청이다”고 옹호했다.
스티브 바넷 웨스트민스터대 교수(언론학)는 “교차겸영을 주장하는 대기업 또는 신문사의 주장은 자본의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면서도 “머독이 영국 언론계에 영향을 미친 경우에서 보듯 교차겸영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을 훼손할 수 있다. 교차겸영에 대한 법적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의 방송통신위원회인 오프콤이 교차겸영에 따른 독점화에 대한 견제를 하고 있다. 머독이 언론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일대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오프콤이 그만큼 견제를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통신위원회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승환 영국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