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변을 달리고 있는 증기기관차. |
기차는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어떤 순간이든지 이것과 연관되면 모두 추억이 되는 것이다. 신병훈련소로 실어 나르던 끔찍한 기억마저도 이제는 낭만으로 읽히니 기차가 지닌 신흥종교 수준의 마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추워지면서 활동성이 크게 떨어졌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잠자던 외로움이 점점 더 커진다. 이럴 땐 추억을 곱씹는 여행이 최고다. 물론 그러기에는 기차여행이 더 할 나위 없고.
행선지를 찾다가 전남 곡성이 문득 기억에 스친다. 우리나라 유일의 증기기관차가 운행된다고 했다. 같은 종족이면서도 자꾸 자신은 다르다고 뻐기며 쏜살같이 내빼는 KTX가 아니라 겨우 시속 10㎞에 불과한 걸음으로 기어가듯 섬진강을 오르내린다는 기차다. 허연 연기 뿜으며 ‘칙칙폭폭’ 거리고, 때로 ‘꿰에에엑’ 귀청 떨어질 정도로 큰 기적소리를 울리며 가는 그런 기차다.
곡성의 증기기관차는 구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왕복 20km 구간을 운행한다. 바로 옆으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노선이다. 봄날 매화 피는 원동역 부근과 겨울철 눈에 파묻힌 영동선 스위치백 구간 등과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기찻길이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무려 500리를 달린 후 저 멀리 광양만으로 내려가 안식을 취한다. 곡성에는 100리가량 되는 거리를 섬진강이 가로지른다.
▲ 섬진강변 레일바이크를 즐기고 있는 여행객의 모습. |
그러던 중 2004년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곡성과 가정 구간에 미니열차를 운행하기로 한 것. 사람들의 호응이 어느 정도일까 떠 보기 위한 시범사업이었다. 반응은 놀라웠다. 너도나도 그 기차를 타려 곡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2005년 3월 드디어 그 구간에 정식으로 증기기관차가 제대로 된 객차를 갖추고 운행되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차는 구곡성역을 출발해 침곡역을 거쳐 가정역까지 느리게 간다. 소요시간은 40분. 가정역에 30분 정차했다가 다시금 40분을 더 달려 되돌아온다. 기찻길은 추후 가정역 너머 압록역까지 3㎞ 가량 더 연장될 계획이다.
증기기관차는 아침 9시30분 첫차가 나간다. 본래 겨울에는 첫차를 건너뛰고 운행을 하는데, 요즘 외국인과 단체 승객들이 예약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비정기적으로 편성된다. 만약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 첫차를 이용하도록 권하고 싶다. 안개 때문이다. 겨울철 섬진강은 안개가 무성하게 끓어오른다. 밤새 차가워진 공기가 따뜻한 수면을 만나서 안개를 만들어내는데, 섬진강은 마치 불이라도 난 듯 자욱한 연기처럼 안개를 만들어낸다.
안개는 가끔 오전 10시가 넘도록 섬진강을 떠나지 않는다. 겨울을 맞아 헐벗은 섬진강변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서일까. 안개의 고집이 대단하다. 대신 그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안개에 젖은 몽환적인 강풍경을 오롯이 담아올 수 있다.
기차는 종종 기적소리를 ‘꿰엑, 꿰에에엑~’ 울리며 나아간다. 이 기차는 1919년 도입된 미카형 증기기관차를 본떠 만든 것이다. 실물모형보다 다소 작다. 실제 모델은 경기도 의왕시 철도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실 이 기차는 증기의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다. 겉은 증기기관차의 대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디젤 심장을 달고 있다. 그러니 기적소리도, 운전실 앞쪽에 둥근 기둥을 눕혀 놓은 것처럼 생긴 화통에서 나오는 천둥소리도 다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냥 속아주자. 추억이 상처받을라.
▲ 새벽 물안개가 만들어낸 섬진강변의 환상적인 풍경. |
▲ 심청이마을. |
김동옥 여행전문가 tour@ilyo.co.kr
▲길잡이: 호남고속도로 익산분기점→익산포항고속도로→완주분기점→완주순천고속도로 서남원IC→곡성 방면 730번지방도→남원 귀석삼거리→좌회전→17번국도→구곡성역.
▲먹거리: 삼기국밥(061-363-0424)이라고 제법 이름난 식당이 있다. 곡성읍내 시장 뒤편 개울가에 있다. 국밥의 국물이 걸죽하지 않고 담백하다. 돼지 새끼보를 재료로 만든 국밥도 판다.
▲잠자리: 곡성읍내에 필모텔(061-362-2345), 알프스모텔(061-363-8025) 등이 있다. 침곡역에서 가정역 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다보면 오곡면 송정리에 한옥펜션단지인 심청이마을(061-363-9910)이 있다.
▲문의: 곡성군청 문화관광포털(http://www.simcheong.com) 관광개발과 061-360-8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