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신문 DB |
올해 역시 자칫 묻힐 뻔한 화재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이 그들의 손을 거쳐 공개되기도 했다. 2011년 대검 화재수사지원팀의 사건일지를 들춰봤다.
# 불타 죽은 아이…사건의 진실은
2002년 1월 27일 경기도 양평의 한 주택에서 화재가 나 임 아무개 군(4)이 사망했다. 당시 화재 신고를 한 사람은 임 군의 부모였고, 양평경찰서는 소방서와 합동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뚜렷한 발화 원인이나 타살 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전기 합선으로 인한 화재와 그로 인한 인명 피해로 결론짓고 종결됐다.
사건 발생 9년이 흐른 후 지난 10월 임 군의 계모였던 류 아무개 씨가 양평경찰서를 찾아왔다. 류 씨는 사건 당시 임 군의 아버지인 임 아무개 씨(45)와 재혼해 살다가 나중에 헤어진 상태였다. 오랜 기간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렸다는 류 씨가 털어 놓은 9년 전 화재사건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화재가 있던 그날 밤 부부는 말다툼을 했고 화가 난 임 씨가 그 자리에 있던 임 군의 머리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류 씨는 경찰에게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를 거부하자 화가 난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류 씨의 증언을 확보한 경찰은 곧바로 재수사에 착수했다. 먼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사건 당시 기록을 넘겨주고 재감정을 의뢰했다. 며칠 뒤 국과수에서는 “방화 가능성도 있지만 전기 합선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며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경찰은 임 군의 아버지인 임 씨를 불러 들여 죄를 추궁했다. 임 씨는 방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류 씨의 증언을 확보한 경찰이 강하게 몰아치자 당시 부부 싸움이 있긴 했지만 아들의 머리가 아닌 방바닥에 기름을 부었고 공중에서 라이터를 켰는데 불이 붙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사건을 송치받은 수원지검 여주지청 역시 임 씨를 기소하기 위한 증거가 시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화재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담당 검사는 대검 화재수사지원팀에 사건 검토를 요청했다. 지원팀은 며칠간 집중적인 조사 끝에 당시 사건 현장과 임 씨의 증언이 한참 모순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결정적인 것은 임 군의 화상 자국이었다. 머리에서 시작해 등을 따라 내려오듯 번진 임 군의 화상 자국이 류 씨의 증언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또 전기 합선과 같은 누전으로 발생하는 화재의 경우 대개 대피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산발적으로 화상 자국이 남지만 임 군의 신체는 피할 시간 없이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임 씨가 아들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임 씨는 11월 16일 방화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돼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피의자 한마디도 결정적 증거
지난 1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6년 만에 화재 현장의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사건은 2004년 12월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난 것으로 시작됐다. 불이 난 1103호에는 사망자가 없었지만 1104호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1104호에 살던 70대 노부부가 유독가스에 놀라 아파트를 빠져 나오려다 1명이 사망하고 1명은 중상을 입은 것이다.
당시 경찰은 1103호에 동거녀와 함께 살던 서 아무개 씨(40)를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서 씨는 “가스레인지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집이 완전히 불타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고 동거녀 역시 서 씨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바람에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설상가상 검찰조사 이후 서 씨가 잠적하는 바람에 수사는 진전되지 못했다.
그 후 6년이 지난 2010년 9월 갑자기 서 씨가 검찰에 출석했다. 그는 여전히 불을 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동거녀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휘발유를 뿌린 다음 몸싸움을 하던 중 갑자기 불이 났다”며 6년 전 진술을 뒤엎었다. 담당 검사는 서 씨가 불을 냈다고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어 집으로 돌려보낸 뒤 화재수사지원팀에 자문을 요청했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한 서 씨도 지원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지원팀은 당시 방 안 온도가 20℃였다는 것과 서 씨가 동거녀와 20여 분간 몸싸움을 벌였다는 진술에 주목했다. 통상 20도 이내의 온도의 밀폐된 공간에 휘발유가 뿌려지고 이로 인해 유증기가 가득 차면 자그마한 충격에도 강한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화재 현장은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튀는 등의 폭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 서 씨는 화재 당시 안면부에 작은 화상을 입었을 뿐이고 동거녀 역시 폭발로 인한 부상을 전혀 입지 않은 상태였다.
지원팀은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휘발유를 뿌린 후 오래 경과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이 났고 동거녀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통보했다. “가스레인지 폭발로 불이 났다”는 서 씨의 진술과는 거리가 먼 결과였다. 검찰이 보고서를 토대로 추궁하자 서 씨는 결국 “꿈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것 같다”는 자백성 발언을 했다. 검찰은 올 1월 방화치사 혐의로 서 씨를 구속 기소했다.
과거 보험사에 근무했던 김 아무개 씨(29)는 “노래방, 주점 같은 곳은 방화로 불이 나도 손해사정인이 사건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소방서나 경찰 역시 피해가 크지 않으면 별로 의심을 하지 않아 거의 보상을 해 줬던 기억이 난다”며 “우리나라도 화재 사건을 신속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