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11월 현정은 회장이 평양 백화원 초대소의 대형그림 앞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기념촬영한 모습과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드릴십 디스커버러 클리어 리더’ 호. |
지난 19일 알려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와중에서도 재계는 의외로 김 위원장의 사망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충격이야 있지만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사망이 중국 사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19일 당일 국내 주식시장과 환율은 급속히 악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튿날인 20일에는 곧바로 반등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재계의 눈과 귀는 현대그룹에 쏠려 있다. 남북경협과 대북사업에서 현대그룹은 상징적인 기업인 데다 현정은 회장이 생전의 김 위원장과 세 차례나 독대하며 대북사업을 확약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정은 회장은 2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 현 회장의 발표는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한 김 위원장 사망에 대한 애도 표시였다.
이후 현 회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김 위원장 조문 방북을 희망했고 통일부도 현 회장의 방북을 허용했다. 대북정책에 강경하던 이명박 정부도 때마침 유연한 자세로 변화할 것을 시사했으며 23일 오전 북측은 개성육로와 항공로를 열어 남측 조문을 모두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엇보다 악화된 채 답보상태인 대북사업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 현 회장으로서는 내심 반가운 일일 듯하다. 현 회장이 특유의 뚝심과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이번 방북으로 대북사업의 전환점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현대아산 측은 표면적으로는 이번 방북의 초점을 오로지 조문에만 맞춰두고 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방북 목적이 조문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조문 준비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정은 회장은 지난 2005년, 2006년, 2009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독대해 대북사업 등을 합의했다. 2009년에는 금강산관광 재개와 이산가족상봉 등 5개항에 합의, 현 회장이 남쪽으로 복귀한 후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북 당국 간 협의가 없는 한 소용없는 일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방북으로 현대그룹이 기대하는 바가 클 것”이라며 “그러나 남북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현정은 회장이 대북사업에서만큼은 뚝심을 발휘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보이는 현 회장의 행보는 사뭇 다르다. 비근한 예로 지난 13~14일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제4이동통신사업에 대한 투자 철회다. 현대그룹이 제4이동통신사업을 추진한 인터넷스페이스타임(IST) 컨소시엄에 투자하기로 했던 것을 전격적으로 백지화한 것.
현정은 회장은 사실 그동안 경영권 방어에 안간힘을 쓰느라 경영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했다.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인 것도 경영권 방어를 위한 것임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런데 최근 대우조선해양이 현대그룹의 백기사를 자처하는 등 그룹 경영권이 안정되자 현 회장은 비로소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는 데 나섰다. 그 중 하나가 제4이동통신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무산됐다.
그런 현정은 회장이 다시 새로운 사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룹 계열사들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을 꾸준히 물색하고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11월 초 전략기획본부를 2개 체제로 나눈 것도 신사업 진출을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그 신사업 중 하나가 ‘조선’이라는 얘기가 있다. 현대그룹이 극비리에 대우조선해양(대우조선) 인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룹의 주력인 현대상선과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데도 대우조선이 안성맞춤이다.
현대그룹의 제4이동통신사업 투자 계획 철회 등 일련의 움직임도 대우조선 인수를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대우조선이 현대그룹의 백기사로 나선 일, 현대상선이 컨테이너선 5척을 처음으로 현대중공업이 아닌 대우조선에 발주한 일 등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현재 대우조선의 최대주주는 지분 31.26%를 보유한 산업은행. 현대그룹의 대우조선 인수 검토설은 2012년 11월 부실채권정리기금 시한이 종료됨에 따라 2대주주인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보유하고 있는 대우조선 지분 19.1%를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의 일정과 상관없이 단독 매각하겠다고 밝힌 부분과 맞물려 나온 이야기다.
대우조선 매각은 지난 2008년 한화그룹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포기해 실패한 바 있다. 당시 포스코-GS의 컨소시엄이 깨져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이들 기업들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매각시 유력 후보였던 포스코의 경우 공개적으로 “관심없다”고 밝혔을 정도다.
현대그룹은 현재 현대건설 인수 실패와 제4이동통신사업 투자 철회 등으로 비축한 자금을 비롯해 1조 원대 실탄이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관측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처음 듣는 소리”라며 “몇 개월 전에도 대우조선 인수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사실 무근인 것으로 파악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현정은 회장과 현대그룹으로서는 연말 연초가 매우 중요한 시기로 보인다. 숱한 손실에도 포기하지 않은 대북사업이 마침내 빛을 볼지, 안정된 경영권을 배경으로 새로운 사업 영역을 확대해갈지 결정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