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강희 감독. 사진공동취재단 |
결국 시기가 문제였다. 전북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리란 예상은 오래 전부터 나왔다. 하지만 또 다른 기대감도 있었다. 이름값 높은 외국인 사령탑이 올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협회가 넌지시 비쳤기 때문이다.
협회 내 홍보국 담당자는 “조 전 감독의 경질 소식이 한 특정 언론을 통해 외부에 공개된 이후 보안에 절대 주의하고 있는 분위기다. 기자회견을 통해 모두 공개된 자리에서 발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뒤숭숭한 기류를 전하는 한편,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협회의 발걸음을 보면 웃음과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런 원칙도 기준도 세우지 못한 기술위원회(위원장 황보관)의 어처구니없는 태도 탓이었다. 12월 13일 새로 선임한 신임 기술위원들과의 상견례를 겸한 기술위원회를 마친 뒤 황보관 위원장은 “아직 후보군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했다. 다만 한국 축구의 정서를 이해하고, 대표팀 및 월드컵 출전 경험이 있는 이름값 높은 사령탑을 인선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며 “외국인 감독에 우선을 두겠다는 것이지, 국내파 감독을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외국인 감독을 먼저 접촉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국내 감독을 모셔오겠다는 얘기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협회 수뇌부는 황보 위원장으로부터 기술위원회 결과를 직접 보고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술위원회는 당시 6대4 비율로 외국인 감독 쪽에 무게를 둔 뒤 국내 감독까지 알아보겠다는 의중이었다.
실상은 이랬다. 다소 젊은 축에 속하는 기술위원들이 외국인 감독에 비중을 둔 반면, 협회 수뇌부는 국내 감독에 대한 미련이 강했다. 사석에서 만났던 협회의 한 고위 인사는 “국내 감독을 아예 배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요즘 나오고 있는 인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국내파 후보군은 바로 K리그에 있는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과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 등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러한 시점에서 과감하게 “내가 맡겠다”고 나설 인물이 있을까. 김 감독이 “뭐라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조금은 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최 감독은 “절대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친 여권’ 인사로 분류되는 김 감독과는 달리, 최 감독도 넓은 의미에서는(특히 현대 가족이라는) 여당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으나 다소 거리를 둬 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최 감독이 좀 더 유력한 카드였다.
사실 부담도 있었다. 더욱이 국내 감독이 선임되면 ‘꿩 대신 닭’이란 좋지 않은 평가를 들을 게 뻔한데 협회가 접촉하더라도 선뜻 지휘봉을 수락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외국인 사령탑을 찾는 과정도 딱히 아름답지(?)는 못했다. 뚜렷한 감독 후보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후보군 선정을 놓고 설왕설래 논란이 일었고, 언론과 축구 팬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러 명의 무직 감독들을 후보로 올려놓으며 추측을 남발했다.
언제나 새로운 사령탑 선임 시기가 오면 빼놓지 않고 거론된 지긋지긋한(?) 이름 거스 히딩크 감독은 물론, K리그 FC서울을 이끌었던 터키 출신의 명장 세뇰 귀네슈 감독 등 조금이라도 한국 축구와 인연이 있던 인물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외국인 사령탑을 운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 감독이 공식 선임됐다. 결국 기술위원회가 아닌, 협회 수뇌부의 뜻이 관철됐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조 전 감독 경질 이후 줄곧 협회를 질타해온 언론들이 후임자로 외국인 사령탑을 물망에 올려놓은 것에 대한 ‘비꼬기 식’ 발언이었다.
그날까지만 해도 협회 홍보국은 “다음 날(12월 21일) 기술위원회가 열린다. 감독 선정 관련 회의다. 그래도 특정 언론에 먼저 새 나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확언했다. 하지만 역시 보안은 없었다. 외국인 감독 후보들과 접촉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감안한 기자들은 개별적인 취재에 돌입했고, 결국 일부 언론이 최 감독이 낙점됐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낼 수 있었다.
사실 온갖 루머들이 난립한 것은 기술위원회의 ‘묻지 마’ 행정 탓이 컸다. 황보 위원장이 외국인 감독 후보와 접촉하기 위해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는 한 스포츠 신문기사가 나온 12월16일, 협회는 어처구니없는 보도자료를 보냈다. “본 기술위원회는 대표팀 감독 인선 과정과 관련하여 일체의 비공개 원칙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란 내용이었다.
결국 정해진 시나리오로 가는 수순이라는 의미가 컸다. 더욱이 조 전 감독을 전격적으로 내친 과정에서조차 주장했던 ‘소통’과 ‘대화’는 아예 없애겠다는 의미로까지 비쳐졌다.
▲ 최강희 감독은 1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제가 임기를 2013년 6월까지 원했다. 월드컵 본선 때는 다른 감독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이 즈음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협회가 외국인 감독을 모셔올 경우에는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기본 연봉으로 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실 100만 달러란 몸값에, 미래도 없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이름난 명장이 잡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기술위원회는 이미 100만 달러로는 좋은 외국인 감독을 영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협회의 핵심 관계자는 “협회가 자금을 좀 더 투자해야 한다. 앞날이 장밋빛도 아닌데다 그간 쌓았던 커리어를 몽땅 잃어버릴 수 있는 험난한 곳에 둥지를 틀겠다는 외국인 감독을 어떻게 고작 100만 달러에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듯 협회 내부 관계자들조차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 마당에, 제대로 된 협상이 이뤄질 턱이 없었다. 혹여 외국인 감독을 운 좋게 모셔왔다고 하더라도 역대 한국 축구를 거쳤던 외국인 감독들 가운데 가장 최악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던 요하네스 조 본프레레 감독 영입과 같은 사태 재발의 가능성도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국인 감독 후보나, 연봉 100만 달러는 철저한 연막작전의 일환이었다. 실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협회는 외국인 사령탑 운운해놓고, 일종의 쇼를 펼친 뒤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최 감독 카드를 꺼냈다. 최 감독이 요 근래 국내 최고의 역량을 펼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최고의 명장이 올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해왔던 축구 팬들은 큰 실망감을 안게 됐다.
▲ 축구협회가 12월 8일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황보관 기술위원장과 김진국 전무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조광래 감독 경질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협회가 외국인 사령탑을 데려올 수 있다고 했을 때, 협상 전문가의 부재가 대두됐다. 일본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감독과 코치뿐 아니라 강화부장과 부사장까지 맡으며 일본 축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황보 위원장이 직접 후보군 리스트 작업을 하고 접촉 과정까지 직접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실상은 전문 협상가는 아니다. 더욱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팀 감독 선임과 같은 큰 작업은 직접 해본 경험도 없다.
이전까지 협회는 모기업 현대중공업으로 돌아간 가삼현 전 협회 사무총장이 외국인 감독과의 협상을 도맡아서 해왔다. 가 전 총장이 빠진 협회의 외교력은 전멸됐다는 우려도 대단히 많았다.
일본 축구가 남아공월드컵 이후 물러난 오카다 다케시 전 감독의 후임자를 정할 때, 일본축구협회(JFA)는 하라 기술위원장이 후보군과 접촉하기 앞서 후보군 정보를 모든 기술위원들과 함께 공유했다. 최초 100명의 리스트를 뽑고, 이를 10명으로 추리는 과정, 마지막 접촉 대상을 선정하는 작업까지 모두가 함께했다. 세부적인 사항을 점수화를 해서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뽑은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은 10명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인물로, 에이전트를 통해 먼저 JFA에 접촉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황보 위원장은 정보 자체를 모조리 오픈했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기술위원들 전부와 정보를 공유할 경우, 자칫 외부에 흘러나가는 걸 두려워했다는 후문이다.
협회 관계자도 “기술위원들이 고루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일단 황보 위원장이 후보를 만들어 오면 이를 수용하거나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형태가 많았던 것 같다”고 지적을 했다. 내부의 불신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물론 이 말이 선의의(기술위원회 입장에서) 거짓일수도 있지만 한 기술위원은 “황보 위원장으로부터 후보에 대해 일언반구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협회는 주먹구구식의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민심이 등을 돌렸고, 적들은 차고 넘쳤다. K리그를 휘몰아친 검은 그림자였던 승부조작 파동이 일어날 때도 프로축구연맹과 각 프로 구단들에게만 책임을 물고 슬쩍 발을 뺐을 뿐,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해결책을 제시한 이가 없었다. 조 전 감독의 목을 자를 때도 성적 부진을 거론하면서 전혀 책임지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조 전 감독과 함께 옷을 벗은 건 박태하 전 대표팀 수석코치, 서정원 코치 등이 전부였다.
여기에 규정과 정관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지만 협회는 최근 2012년 2월 29일 예정된 쿠웨이트와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최종전이 다급하기 때문에 열흘 정도 앞당겨 대표팀을 소집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대표팀 운영 규정에 따르면 경기 당일을 포함해 나흘이 소집 훈련이 가능한 날짜의 전부다.
아무리 주변에서 뭐라고 비난해도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협회만의 기준과 기조를 꼿꼿하게 유지한다. 2012년에도 한국 축구의 불편한 행보는 당분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아님 말고? 뭐하는 플레이…
인터넷 사용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희망 고문’이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과거 인기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나왔던 대사로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대신, 내내 애매모호한 표현을 써서 ‘희망’이란 명목 하에 심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의미다.
한국 축구에도 희망 고문이 있었다. 외국인 사령탑 영입이 축구 팬들에게 ‘희망 고문’을 줬다. 최근까지 각종 축구 게시판에는 팬들은 자신만의 ‘영입 후보’ 리스트를 올려놓으며 이런저런 추측을 했다. ‘억’ 소리가 나는 엄청난 이름값의 명장들부터 그저 그런 후보 중 하나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오르내렸다.
뜬구름 잡는 루머들을 퍼 올리는 몰지각한(?) 일부도 있으나 대개가 마니아 차원을 넘어 오타쿠에 가까운 이들이 끊임없이 화제를 양산해냈다. 해당 감독들에 대한 프로필과 연봉 등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상황을 적으며 굉장히 흥미로운 정보를 줬다.
팬들이 가진 정보력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팬들 가운데 일부는 축구계에 별도 인맥이 있고, 선수들 및 구단 스태프와도 친분 관계가 있어 전혀 허무맹랑한 소식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외국인 사령탑은 끝내 희망 고문에 그쳤다. 물론 예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미 한국 축구는 여러 차례 팬들에게 그럴싸한 희망을 준 뒤 ‘아님 말고’ 식으로 넘어간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