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깜짝카드 박재홍
▲ 프로야구선수협회 제11차 정기 총회에서 차기 회장으로 선임된 박재홍. |
일단 선수들은 구단마다 한 명씩 회장 후보를 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후보마다 정견 발표를 하기로 했다. 결국, 손승락(넥센), 이혜천(두산), 조성환(롯데), 현재윤(삼성), 정원석(한화), 서재응(KIA), 봉중근(LG) 박재홍(SK)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마했다. 애초 당선이 유력한 후보는 서재응이었다. KIA에서 강한 리더십을 선보인 서재응은 여러 선수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박재홍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박재홍은 회장 후보로 나설 의사조차 없었다. 이호준을 비롯한 팀 내 후배들이 적극 추천하기에 얼떨결에 후보로 나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총회에서 박재홍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현장에 있던 모 선수는 “박재홍 선배가 총회 분위기를 압도했다”고 귀띔했다. 사정은 이랬다. 초상사용권과 관련해 비리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권시형 전 사무총장은 신임 회장 선출에 앞서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이때 손을 들고 반론을 제기한 이가 박재홍이었다.
박재홍은 권 전 총장에게 “도대체 게임회사로부터 뒷돈으로 받은 금액이 얼마냐”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선수들을 대표해 각종 의혹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을 요구했다. 평소 선수협에 무관심했던 박재홍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선수들은 깜짝 놀랐다.
결국, 선수들은 박재홍에게 표를 몰아줬고, 유력 후보와는 거리가 멀었던 박재홍은 87표로 85표의 서재응에 2표 차로 앞서며 당선됐다.
“내가 생각해도 의외였다”는 박재홍의 말처럼 그의 당선이 알려지자 야구계는 “의외”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모 야구인은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이기적이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소릴 듣던 박재홍이 선수협 회장에 당선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박재홍의 좁은 인간관계가 당선에 큰 역할을 한지 모른다”고 평했다.
박재홍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좋게 말하면 인간관계가 복잡하지 않고, 나쁘게 말하면 비사교적인 사람이다. 선수들이 나를 전자로 평가해준 것 같다. ‘박재홍이 당선되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야구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
박재홍이 신임 선수협 회장이 되고서 11일 후, 이번엔 선수협 사무총장 대행이 발표됐다. 항간엔 모 야구 해설가 A 씨와 포수 출신의 전직 야구인 B 씨 등이 사무총장이 되려고 분주히 뛴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A 씨는 선수협 사무총장엔 뜻이 없었다. B 씨 역시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마평에 오르던 인물이었다.
결국, 선수협 이사들이 선택한 인물은 전 삼성 투수 박충식이었다. 박재홍 회장만큼이나 의외의 발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박충식은 2002년 은퇴 후 2003년 호주에 이민을 떠나 최근에야 귀국한 인물이었다. 8년 가까이 야구계와는 담을 쌓았기에 일부 젊은 선수들은 박충식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박재홍 신임 회장은 “박충식 선배는 선수협 태동 때부터 가장 전면에 서서 싸웠던 야구인”이라며 “나만큼 이해관계가 없는 야구인이라, 투명하게 선수협 살림을 챙길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추천으로 박충식은 사무총장 대행 후보에 올랐다. 각 구단 대표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박재홍-박충식’ 콤비가 선수협 전면에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 지난 11월 10일 프로야구선수협회 내부 비리 문제 해결을 위해 각 구단 대표들이 대전역사 회의실에서 모여 긴급 회의를 열고 새 집행부 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
‘박재홍-박충식’ 콤비의 등장에 모두가 환영을 보낸 건 아니었다. 일부에선 “회장 선출부터 사무총장 대행 선임까지 절차상의 하자가 수두룩했다”며 두 사람의 하차를 주장하고 있다. 신임 선수협 집행부의 대표적인 반대파인 모 팀의 C 선수는 “각 구단 후보들이 정견 발표를 하기로 했으나, 몇몇 후보들의 석연찮은 반대로 정견 발표가 취소되며 곧바로 회장 투표가 시작됐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 선수는 “2군 선수들의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모 팀의 후보가 정견 발표를 할 경우, 그 선수 쪽으로 표가 몰릴까 봐 박재홍을 비롯한 몇몇 후보들이 ‘정견 발표를 하지 말자’고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이는 선수들에 대한 명백한 기만행위”라고 주장했다. C 선수는 “권시형 전 사무총장 해임 역시 정관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C 선수의 주장으론 사무총장 해임은 선수협 정관에 따라야 한다. 정관엔 ‘총회 전체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사무총장을 해임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총회에서 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몇몇 선수들이 주도해 권 전 총장의 사퇴를 막무가내로 요구했다는 게 C 선수의 주장이다. 권 전 총장 역시 “정관을 따르지 않은 해임은 엄연한 불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C 선수에 동조하는 수도권 팀의 D 선수는 “박 사무총장 대행 선임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관상 사무총장은 신임 이사회에서 뽑아야 한다. 하지만, 박 회장은 긴급 임시 이사회에서 사무총장 대행을 뽑았다. 그것도 다른 구단 대표들이 추천한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자신이 밀던 박충식 선배를 사무총장 대행으로 끝까지 고집했다. 정관에 어긋나고, 회장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박 사무총장 대행은 당장 사퇴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임 집행부를 찬성하는 쪽의 입장은 어떨까. 회장 후보로 나섰던 모 선수는 “정관 어디에도 정견 발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며 “당시 정견 발표를 생략한 건 회장 선거에 앞서 손민한 전 회장이 특정 후보가 당선되길 바라는 듯한 발언을 하자, 선수들 사이에서 ‘손 전 회장의 불필요한 입김을 차단하려면 정견 발표를 생략하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그렇게 결정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긴급 임시 이사회에 참석했던 모 구단 대표도 “박 회장이 박 사무총장 대행 선임에 압력을 가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박 회장은 ‘선수 출신이 선수협 사무총장을 맡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을 나타냈고, 참석자 모두 박 회장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모 구단 대표가 ‘다양한 후보를 놓고 검증작업을 펼친 뒤 심사숙고 끝에 선임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신임 회장이 뽑힌 만큼 서둘러 사무총장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여기다 ‘박충식 선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별다른 반대 없이 박 사무총장 대행이 만장일치로 뽑혔을 뿐이다.”
▲ 지난 12월 9일 NHN본사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제11차 정기총회에서 선수들이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뉴시스 |
C 선수는 “절차상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신임 집행부는 정서상으로도 큰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박 회장과 박 사무총장 대행이 특정 세력의 지지로 당선됐고, 두 이가 같은 무등중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것이다.
야구계 일부 인사들도 같은 주장을 한다. 이들은 전직 야구선수 Y 씨와 L 씨가 측면에서 ‘박재홍-박충식’ 콤비의 당선을 위해 여론몰이를 주도했고, 특정 학교 선후배가 신임 집행부가 되면 또 다른 비리가 재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L 씨와 절친한 모 변호사가 신임 집행부에 여러 가지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회장은 “악의적인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박 회장은 “항간에서 거론하는 Y 씨와 L 씨는 회장 선거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며 “박 사무총장 대행 역시 나와 선후배 관계이기는 하나, 최근에야 다시 본 사이”라고 반박했다. 박 회장은 모 변호사와 관련해서도 “선수들이 법률관계에 무지해 몇 가지 조언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회장 당선 이후 어떠한 자문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이참에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고, 깨끗한 선수협 운영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다. 첫 번째가 사무국장 공모다. 박 회장은 “과거처럼 사무총장에 모든 권한이 쏠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사무총장은 선수협 행정을 담당하고, 마케팅과 영업은 사무국장이 담당하는 ‘건전한 견제 체제’를 갖출 생각”이라며 그 시발점으로 조만간 사무국장을 투명하게 공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는 외부 법률감시단 공모다. 박 회장은 “야구에 관심 있는 외부 변호사를 공모해 그들에게 법률자문을 맡기고, 조언을 구할 참”이라며 “이들이 일종의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선수협의 활동을 견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 번째는 철저한 회계감사다. 2000년 발족 이래 선수협은 외부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하지만, 회계사가 직접 책임을 지는 회계감사는 생략됐다. 그저 회계법인의 검토의견서만 있을 뿐이었다. 박 회장은 “이번에 회장이 되고 나서 11년 만에 처음으로 회계감사를 실시했다”며 “투명한 선수협 운영을 위해 1년에 한 번씩 회계감사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은선협’ 내분 삼국지
은선협이 이처럼 이합집산을 이룬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국 야구계가 유일하다. 야구인들은 하나같이 은선협의 통일을 외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유가 있다.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세 은선협 모두 게임사로부터 지급되는 초상사용권을 받으려고 급조된 측면이 크다. 이전엔 어느 조직도 은선협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게임사가 은퇴선수들의 초상사용권을 쓰는 대가로 돈을 지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은선협이 우후죽순으로 탄생했다. 이들 은선협은 은퇴선수들로부터 초상사용권에 대한 위임장을 받은 후, 게임사와 협상을 벌이고서 은퇴선수들에게 초상사용권 대가액을 지급한 뒤 일정한 수수료를 떼고 있다.
대개 선수협 산하 은선협은 2000년 이후 은퇴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일구회 산하 은선협은 2000년 이전 은퇴선수들이 중심이다. 두 은선협은 대화를 거부한 채 서로의 존재조차 부정하고 있다. 일구회 산하 은선협에서 탈퇴한 별도의 은선협은 말할 것도 없다. 일구회와 등을 돌린 지 오래다.
모 야구인은 “야구인들이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현역 선수들의 눈에 선배들이 어떻게 비치겠느냐”며 “당장 은선협이 통일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박 회장은 일구회 산하 은선협 관계자들을 만나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앞으론 선수협 산하 은선협 관계자들을 만날 계획이다. 박 회장이 선수협에 이어 은선협까지 정상화시킬지 야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