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군 변산면에 위치한 해변마을 '모항'. 햇살도 짠 내가 난다는 이곳에서 줄곧 뿌리를 내려온 박형진 씨(65)의 가슴 밭엔 '유기농'과 '시'라는 인생의 심지가 심어져있다. 그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길을 따라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줄곧 그는 유기농 농사를 고집해왔다. 그럴수록 땅은 비옥해졌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척박했다. 그래서 척박한 삶의 텃밭에 부지런히 시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왔다. 1992년 시 '봄 편지 외 6편'으로 등단해 이미 다섯 권의 시집을 낸 농부 시인. 농부로서 희로애락과 고향 부안의 아름다운 자연이 고스란히 담긴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 '밥값도 못하면서 무슨 짓이람', '다시 들판에 서서', '콩밭에서', '내 왼쪽 가슴 속의 밭'. 가난한 농사꾼이 겪는 애환과 그 과정 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마음을 농사짓는 틈틈이 시로 써내려갔다.
그는 25년 동안 대안학교 '변산 공동체'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도 농사를 가르치기도 했던 박형진 씨. 자연에 순응하며 농사를 짓고 시를 짓는 그에게 한여름 백중(百中)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지는 절기다. 논밭에 곡식이 가득 들어차 더 이상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백중이 되면 그는 정성껏 호미를 씻어 걸어두고 자유로이 망중한을 즐긴다.
남의 동네라도 논 한 필지 내 것으로 가져보고 싶었다는 박형진 씨. 마침내 꿈에 그리던 논밭에서 얼떨떨한 감정으로 첫 수확을 했던 기억이 엊그제만 같다. 그는 지금 각각 4000㎡나 되는 논밭을 일구느라 허리 펼 새가 없다. 이 모든 게 과분하기만 하다는 박형진 씨. 그는 농민운동을 하다 자연스럽게 유기농으로 옮겨갔다.
'흙과 물을 살리는 일이 곧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일이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농부의 소임이다'라며 그는 너른 논밭을 유기농법으로 고집하고 있다. 논에 우렁이를 풀어 제초하고 쉼 없는 호미질로 흙의 생명력을 키우고 있다. 풀의 생태나 작물의 생리를 잘 알게 되면 죽자 살자 약을 치며 풀과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단다.
유기농을 하면서 숨통이 트인다는 박형진 씨. 부지런한 집 호미는 결코 녹슬지 않는다는 말을 입증하듯 그는 오늘도 호미의 날을 벼린다.
바쁜 농번기가 지나고 백중에 집 앞 바다로 나가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박형진 씨. 물때에 맞춰 드러난 갯벌은 그에겐 또 다른 텃밭이자 휴식처나 다름없다. 호미로 잠시 동안 갯벌을 일구기만 하면 숨어있던 바지락과 고동을 한 바구니나 수확한다고 하니 이보다 넉넉한 텃밭이 없단다.
바다가 허락한 시간에 온전히 몰입해 묵직해진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박형진 씨. 신나게 캐 온 고동과 조개를 삶아 고향 선배들과 막걸리를 함께 하는 백중 망중한이 즐겁기만 하다. 농부에게 쉬어가는 시간도 자연이 내어준 것이다. 호미를 들고 나가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땀을 식히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논밭에 난 풀을 뽑는 고된 노동을 장맛비가 잠시 쉬어가게 한다.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시계에 순응한다는 박형진 씨. 그렇게 순간순간의 평온을 유지하며 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땅을 붙들고 살던 농사꾼 박형진 씨가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여름 길을 걷는다. 배낭 하나에 의지한 채 오직 두 발로만 걸어온 거리가 4년 동안 약 2500km. 고향 부안에서 출발해 총 열 차례에 걸쳐 70여 일을 걷고 또 걸었다. 그가 고행과도 같은 도보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누이의 죽음이었다.
누이의 묘에 맨발로 가 닿겠다는 서원을 세운 후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걸어서 국토 순례를 시작했다. 굳이 무언가 얻겠다고 떠난 길은 아니었다. 그저 농사에 메인 채 삶을 끝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그를 낯선 길로 이끌었다. 고독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운 도보여행. 그것을 통해 그도 더 자유로워졌다.
농부도 한없이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시를 통해 그리고 도보여행을 통해 확인했다. 이제 마지막 여정을 앞둔 박형진 씨는 '나는 어떤 사람이고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라고 새벽길을 묵묵히 걸으며 스스로 묻는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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