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과 통합 수능 이후 이과생의 문과 침공…한 단계 높은 대학 입학 후 원래 희망 학과로 ‘전과’
한 외국어고등학교 현직 교사 A 씨의 말이다. 문과에서 우수 학생들만 모인다는 외고에서는 2022학년도 입시 결과를 받아 들고 충격이 컸다고 한다. 2022학년도부터 고등학교 문과와 이과가 통합으로 수능 수리영역을 치르는데, 그 영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문·이과 통합이 가져다준 충격을 고등학교와 대학교 현장에서 전방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9월 초는 대입 입시에서 수시 끝자락 시즌이다. A 교사는 “현재 인문계 고등학생은 수시가 아니면 대학교 보내기가 어렵다고 본다. 수능까지 갔을 때 살아남을 학생이 전교에 한두 명 수준이다”라고 토로했다. A 교사의 이 같은 말처럼 문과에서는 수능을 사실상 배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입시 현장에서는 문·이과 통합 수학으로 이과생들이 엄청나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서 3학년생을 지도하고 있는 B 교사는 “기본적으로 문과는 수학을 못 해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과하고 수리영역을 같이 본다면 문과는 이과에 깔아주는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 교사의 말처럼 2022년 대입 입시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이과의 문과 침공’이 벌어졌다. 과거와 달리 최근 입시에서는 교차지원의 제한이 없다. 서울 소재 대학교 중 비교적 중위권 이과 계열에 입학할 성적이면 연세대와 고려대 문과까지 지원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A 교사도 “실제로 K 대, D 대, H 대 정도 이과 계열 입학할 성적이면 연고대 문과 하위권까지 넣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문과 자체를 꺼리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A 교사도 “약 10년, 20년 전만 해도 문과반이 이과반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 이과반이 문과반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면서 “요즘 고등학생이 똑똑하다. 문과 나와서 뭐 할지에 고민이 많다. 대기업 공채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일자리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학 못해서 문과 온 학생이 많은 현실에서 통합 수능은 사망선고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문과의 이과 침공 첫해였던 2022년을 지나면서 대학교 내에서도 위기가 감지됐다. 수능에서 문과로 교차지원해 입학한 학생 상당수가 이과로 복수전공을 하거나 전과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대로 유명한 C 학교 입학처장은 “영문과 학생이 수학 수업을 듣고 있다. 전과 희망 비율이 절반을 향해 가고 있다”고 전했다. C 학교 입학처장은 이과 계열 교수다. 그런데도 위기를 현실로 느끼고 있는 셈이다.
C 학교 입학처장의 말처럼 유명 학교에서 일단 문과로 입학한 뒤 복수전공이나 전과로 원래 희망 학과로 바꾸는 대학생이 대폭 늘어나고 있다. C 학교 입학처장은 “문과대 교수들이 ‘학과의 절반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문과가 소멸하게 된다. 학과 정원을 줄인 것도 아니어서 반발도 어렵다’는 분위기다”라고 전했다.
이번 문·이과 통합 수능이 ‘인문계 죽이기’라는 음모론까지 나온다. A 교사는 “문·이과 통합 수능의 문제점이 있다고 말하면 ‘통합형 인재를 키워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할 말이 없어진다. 수시가 아니면 과거에는 최소 서울 소재 대학교를 노려볼 문과 학생들이 지방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B 교사도 “수학을 잘하면 좋다. 그런데 국문과 전공을 할 학생이 꼭 수학을 이과 계열 진학할 학생만큼 해야 하냐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고위직 인사가 사석에서 문과 교수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고위직 인사는 과거 ‘문·이과가 통합으로 수리영역을 본다고 문과가 불리한 게 어디 있느냐’라고 했었는데, 최근에는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2022학년도 입시는 통합 수능 이외에도 정시 비율이 확대되면서 그 충격이 커졌다는 분석도 있다. 2019년 10월 ‘조국 사태’ 후폭풍이 일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시 확대’를 주문했다. 이에 교육부도 주요 15개 대학에 정시 비율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2022학년도부터 정시 비율이 현행 30%에서 40%까지 늘어났다고 보고 있다.
2022학년도 문과로 교차지원해 간 학생들이 전과에 성공하거나 복수전공을 하는 사례가 소개되면 앞으로 이과의 문과 침공은 구조적 현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B 교사는 “입시 문제는 대부분 학생이나 학부모가 ‘문제를 지적하느니 그 시간에 공부나 하자’는 쪽이 많아서 이런 상황이 덜 알려진 것 같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모두 대선 당시 정시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만약 현행 정시 비율 40%에서 50%나 그 이상으로 정시가 확대된다면 문과 학생은 갈 곳이 없다. 이게 냉정한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문과에서 수능은 사실상 배제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A 교사도 “그래도 외고인데 수능으로 대학 간 학생이 전교에 1~2명이란 게 현실이다. 수능은 없다고 생각하고 수시에 올인하는 추세다”라면서 “대학교에서 과거 수시로 뽑을 때 보던 수능 최저 등급도 사실상 사라졌다. 최저 등급도 사라진 데다 어차피 수능까지 가면 입시는 망한 것으로 생각해 수시에 올인 중이다. 명문고라고 해도 상황이 비슷하다. 문과에서 수능으로 최상위권 가는 학생은 없다고 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가 심각하지만, 자연스레 곧 사라질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B 교사는 “어차피 인구 절벽이 코앞이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절반도 안 된다는 얘기가 있다. 현실적으로 입시 문제 관심은 고등학생과 고등학생 자녀를 가진 학부모 말고는 큰 관심이 없다. 현장에서는 아우성이 있어도 관심 없이 사라질 것 같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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