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28일 왼쪽부터 김상현(KIA), 박명환(LG), 현재윤(삼성), 이혜천(두산) 등 프로야구 4개 구단 대표 선수들이 투명한 사무총장 선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연합뉴스 |
# 박충식 사무총장 선임
지난해 12월 20일. 박재홍 신임 회장은 각 구단 대표들이 모이는 임시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공석인 선수협 사무총장을 뽑자고 제의했다. 일부 구단 대표는 “신임 회장을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사무총장을 선임하느냐”며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향후 총회에서 사무총장을 선임하자”고 맞섰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일부 구단 대표의 반대에도 신임 사무총장 선임안을 밀어붙였다.
결국 박 회장의 뜻이 관철됐다. 이날 임시 이사회에선 박 회장의 추천을 받은 전 삼성 투수 박충식이 사무총장 대행에 선임됐다. 박 회장은 “구단 대표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박 사무총장과 함께 선수협의 비리를 모두 밝히겠다”며 “선수들의 의지를 모아 투명하고 원칙 있는 선수협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박 사무총장 선임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이 “임시 이사회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사무총장 재선임을 요구한 것. 급기야 12월 28일 삼성, 두산, LG, KIA 선수단 대표는 경기도 용인의 커피숍에 모여 “박 회장의 박 사무총장 선임을 인정할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4개 구단 대표는 “내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박 회장은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약속했으나 원칙을 저버리고, 외부세력과 결탁해 자신이 내정한 박충식 씨를 사무총장으로 선임했다”면서 “선수협 대표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 채 단독 처리한 박 회장의 사무총장 선임이 철회되지 않는 한 선수협 탈퇴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과연 4개 구단 대표들이 주장하는 ‘정당한 절차 무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삼성 대표였던 현재윤은 “당시 임시 이사회에 모인 구단 대표들은 대표 자격이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다”고 털어놨다.
“두산 이재우 대표는 이혜천 대표가 수술하는 바람에 대신 임시 이사회에 참석했다. LG 이진영, 넥센 송지만도 대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참가했다. 당연히 세 사람은 이사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박 회장이 ‘임시 이사회 때 사무총장 대행 선임에 반대하지, 왜 지금 와서 반대하느냐’고 따지지만 당시 구단 대표 가운데 상당수는 회장의 일방적인 사무총장 선임에 반대할 법적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대부분 참석자는 이날 사무총장을 선임하는지 전혀 모르고 상황에서 임시 이사회에 참가했다.”
현재윤은 박 사무총장이 구단 대표들의 만장일치로 뽑혔다는 박 회장의 발언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장일치는 박 사무총장 선임을 정당화하려는 수사에 불과하지 절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임시 이사회에선 박 사무총장을 두고 구단 대표들의 찬반투표가 정확히 4 대 4로 갈렸다. 이때 박 회장이 ‘나도 의결권이 있으니 투표에 참여하겠다’며 박 사무총장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5 대 4로 박 사무총장 선임이 결정된 것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째서 박 회장은 이처럼 서둘러 사무총장 선임을 강행한 것일까. 박 회장의 측근인 아무개 선수는 다음과 같이 사무총장 선임 강행 이유를 설명했다.
“2012년 1월 15일을 전후로 전 구단이 스프링캠프를 떠날 예정이었다. 박 회장도 SK 스프링캠프를 따라가야 했다. 전임 사무총장과 그 두둔세력의 비리를 밝혀내고 선수협의 파행 운영 증거를 찾아내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선수협 내부에 있어야 했다. 특히나 1, 2월은 전임 사무총장의 비리 관련 재판이 잡혀 있어 선수협이 어느 때보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회장이 스프링캠프로 자릴 비우고 사무총장까지 궐석이라면 선수협 운영이 올스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으로 선수들 사이에서 ‘사무총장 선임을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박 회장도 사무총장 선임 카드를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정식 구단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사무총장 선임 투표를 강행한 것에 대해서도 “박 사무총장은 대행일 뿐 정식 임명된 상태가 아니었다”며 “그렇잖아도 총회를 통해 정식 선임절차를 밟으려 했는데 전임 사무총장의 조종을 받는 몇몇 구단 선수가 박 회장의 도덕성에 흠집을 주려고 박 사무총장 대행을 마치 정식 사무총장 선임인 것처럼 발표했다”고 분노했다.
결국 선수협은 1월 3일 서울 삼정호텔에서 임시 총회를 열고, 문제가 된 사무총장 선임안을 재투표하기로 결정했다. 애초 박 사무총장 선임에 대한 승인투표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복수의 후보를 두고 비밀투표를 하자”는 요구가 거세 박충식 외 추가로 이도형, 이종열, 양준혁 등 3명이 후보로 올랐다.
당시 회의장엔 “박충식이 사무총장이 되면 박 회장의 반대파가 선수협에서 탈퇴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며 긴장감이 더해졌다. 투표 결과 박충식이 333표 가운데 183표를 얻어 공식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자 한쪽에선 손뼉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씁쓸한 기운이 맴돌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탈퇴 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투표가 끝나자 현재윤은 “투표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며 “박 회장과 박 사무총장이 선수협을 바로잡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 양측 비호세력의 정체
박 사무총장의 정식 선임으로 선수협 내분은 진정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 회장 지지파와 반대파의 앙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양측은 “뒤에 숨어 선수들을 조종하는 배후조종자가 있다”며 서로를 불온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로 표현하고 있다.
박 회장 지지파는 반대파 뒤에 전임 사무총장과 그 비호세력이 숨어 있다고 단언한다. 박 회장을 지지하는 아무개 선수는 “전임 사무총장 K 씨와 비호세력이 자신들의 비리를 숨기고자 끊임없이 현 선수협 집행부를 흠집 내고 있다”며 “박 사무총장 선임을 반대하던 4개 구단 대표들이야말로 K 씨의 술수에 놀아나는 대표적인 꼭두각시”라고 비판했다.
이 선수는 “4개 구단 대표들이 K 씨와 각별한 사이였다는 설이 있다”며 “전임 사무총장은 술 접대와 향응 제공으로 선수들의 환심을 샀던 이였기에 혹시 일부 선수가 전임 사무총장의 향응 제공 폭로가 두려워 K 씨 비호에 앞장서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나타냈다.
박 회장 지지파는 임시 총회에 앞서 4개 구단 대표가 선수들에게 배포한 ‘프로야구 선수들께 드리는 말씀’이란 14쪽짜리 유인물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유인물 내용이 지극히 전임 사무총장 두둔 일색이고, 선수가 작성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글 구성이 완벽했다는 게 이유다. 일부 선수는 이 유인물을 전임 사무총장이 작성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파는 “소설보다 더한 소설”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아무개 선수는 “우리 역시 전임 사무총장의 비리 의혹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며 “우리가 K 씨의 꼭두각시로 불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임 사무총장 비리 의혹을 덮자는 게 아니다. 다만 K 씨의 재판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다. 만약 법원에서 K 씨의 무죄를 선고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컷 비리 사범으로 몰아 사무총장직에서 내쫓았는데, 무죄가 확정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번복할 참인가. K 씨 비리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다. 우리가 박 사무총장 선임에 반대했던 건 절차상의 문제이지, 박 회장과 박 사무총장 개인을 반대한 게 아니다. 임시 총회에서 박 사무총장이 정식으로 선임됐을 때 우리가 ‘결과에 승복한다’고 천명한 것도 순수한 의도로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K 씨를 한통속으로 모는 것이야말로 현 집행부와 검은 세력의 유착관계를 덮으려는 의도 때문이 아닌지 묻고 싶다.”
박 회장 반대파가 지목하는 검은 세력은 강병규다. 박 사무총장 선임에 문제를 제기했던 선수들이 유인물에서 ‘더 이상 강병규 선배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적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이 유인물에서 ‘강병규 선배는 지금까지도 박 회장과 선수협의 뒤에서 자문역을 한다고 자처하고 있다. 지금도 박 회장의 뒤에서 아낌없는 조언을 하는 것으로 안다. 더군다나 강 선배의 재판을 담당하는 변호사가 선수협 사무차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며 강병규를 향해 더는 선수협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한 선수는 “강병규가 선수협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며 “강병규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선수협 문제를 조언했다면 새 집행부가 구성된 바로 지금, 더는 선수협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병규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은 선수협 태동을 이끌었던 초창기 멤버로서 선수협 정상화를 위해 선배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선수협 비리 의혹이 법정 밖으로 알려지기까지 강병규의 역할이 컸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끊임없이 선수협 비리 의혹을 제기했고 몇몇 야구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강병규는 “선배 가운데 누구라도 선수협 정상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면 나는 뒤에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 몰라라’하는 차가운 외면과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밖에 없었다. 어느 선배도 선수협 문제를 바로 잡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며 “나까지 침묵했다면 선수협 비리는 아직도 법정 안에 묻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병규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도 “악의적인 거짓 이야기”라며 “현 집행부가 잘못을 범하면 그때도 가차 없이 비판할 것”이라고 했다. 강병규는 ‘더는 선수협 문제에 관여하지 마라’는 후배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나와 현 집행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를 불순 세력으로 모는 것 자체가 K 씨를 두둔하려는 세력의 모략”이라며 “K 씨의 비리 혐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내 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병규는 “앞으로도 선수협이 바른길을 가도록 계속 조언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지난 3일 열린 프로야구 선수협 임시총회에서 박재홍 신임 회장이 기자들에게 회의자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여기저기 지뢰투성이다. 문제는 지뢰의 파괴력이다. 자칫 잘못 하다간 프로야구 전체가 공멸할 수 있는 핵폭탄급 지뢰도 있다. 전임 집행부의 비리 의혹을 어디까지 제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 집행부에 참여하는 모 야구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전임 집행부의 비리 의혹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관계자가 연루돼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후자가 문제였다. 이 야구인은 “선량한 사람들마저 비리 당사자로 몰릴까 두렵다”며 “이미 야구계엔 ‘누가 누구한테 향응과 금품을 받았다더라’하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사실이다. 한 전직 야구감독은 선수협 전 간부로부터 고급 명품 시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직 감독은 “선수협 전 간부가 ‘야구계 발전을 위해 애써줘 고맙다’며 시계를 선물해 한사코 사양했으나 ‘다른 의도가 없다’며 권하는 바람에 결국 시계를 받았다”며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아 다시 시계를 돌려주려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야구인은 역시 같은 선수협 간부로부터 국외 연수비를 제공받았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야구인은 “국외 연수비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지원받은 것”이라며 “절대 부정한 돈이 아니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친목모임으로부터 일부를 지원받았고, 선수협으로부터는 내가 게임업체로부터 받을 초상사용권료 500만 원을 선지급받았을 뿐이다. 어째서 이 돈이 선수협 전직 간부와 연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마해영은 전임 집행부의 비리 혐의가 회자될 때마다 거론되는 인물이다. 전임 집행부 반대파는 “마해영이 전임 사무총장와 함께 선수협을 파국으로 이끈 장본인”이라며 “마해영이 선수협 산하 은퇴선수협 사무총장을 맡으며 전임 사무총장으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해영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반박했다. “내가 선수협으로부터 돈을 받은 건 선수협 자회사 감사로 선임돼 정당한 임금을 수령한 것일 뿐, 전임 사무총장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실제 수령액도 검찰 기소내용과는 다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K 씨의 검찰 기소내용을 보면 마해영은 2010년 4월부터 10월까지 급여와 교통비로 2650만 원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마해영은 “두 달가량 임금이 지급됐을 뿐, 이후엔 전혀 돈을 받지 않았다”며 “실수령 액은 8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
선수협 현 집행부는 K 씨의 재판 진행 상황을 고려해 비리 폭로 수위를 조절할 계획이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