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목적지 없이 운전기사 마음이 닿는 곳으로 훌쩍 떠나는 수상한 버스가 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어디든 가는 방향만 같으면 누구나 버스에 오를 수 있다는 빨간 버스. 여행에 대한 열정을 담아 전체를 빨갛게 칠한 버스의 운전기사는 이승렬 씨(60)다.
마흔 살 젊은 나이에 심장병을 앓은 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약초를 찾아 전국 팔도를 다니기 시작한 게 버스 여행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승용차로 다니던 것이 숙식이 가능한 버스로 바뀌었고 어느덧 약초를 찾는 일보다 새로운 여행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빨간 버스를 운행하면서 '두 번째 삶'이 시작된 셈이다. 그에게는 든든한 여행 친구가 있다. 5살의 반려견 '바둑이'다. 강아지 때부터 버스에서 자라 승렬 씨와 여행한 지 5년째인 프로 방랑견이다. 때문에 전국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다.
오늘의 여행지는 바둑이도 승렬 씨도 좋아하는 넓고 푸르른 보성의 녹차 밭이다. 코끝에 닿는 익숙한 녹차 향기에 바둑이의 꼬리 프로펠러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단둘이 녹차 밭을 거닐고 영상 촬영도 하며 오붓한 산책을 즐긴 후 버스로 돌아온 승렬 씨가 분주히 사다리를 꺼내든다.
승렬 씨가 버스 여행을 한 지도 어느덧 10년 처음엔 바둑이 없이 혼자서 여행을 다녔다. 바둑이를 만나게 된 건 5년 전 아랫동네 마을회관에서 운명처럼 바둑이를 만난 후부터 둘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버스 계단도 못 올라갈 정도로 작고 대화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커서 여행을 즐길 줄 알게 된 바둑이.
멀미도 없고 잠자리도 가리지 않는 아이라 딱 여행 체질이다. 게다가 간혹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해주는 붙임성까지 갖췄다.
승렬 씨에게는 여행을 함께 즐기는 바둑이 뿐 아니라 두 마리의 반려견이 더 있다. 바로 '토돌'이와 '순심'이다. 토돌이는 바둑이의 아들이고 순심이는 바둑이 손녀이자 토돌이 조카다. 처음엔 바둑이와 토돌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토돌이가 낯선 사람을 보고 짖는 탓에 지금은 순심이와 함께 승렬 씨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빨간 버스 곳곳에 여행의 추억을 남기는 게 취미인 승렬 씨. 특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버스 외부에도, 버스 좌석에도, 창문에도 온통 바둑이 그림으로 가득하다. 이번엔 토돌이와 순심이까지 함께 여행을 온 기념으로 버스 옆면에 가을 여행의 추억을 남겨본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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