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운데 사진은 하야한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모습이고, 왼쪽는 당시 이를 경향신문(5월 29일자)이 특종보도한 지면. 맨 오른쪽은 1967년 경향신문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목포 지원유세 기사. |
#윤양중 “특종 하나로 날개 달다”
1960년 5월 29일 밤 11시, 윤 기자가 사건 담당으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일 이화장을 잘 지켜보면 큰 기사거리가 있을 거요.” 중년남자의 목소리였다. 이화장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승만 박사의 사저. 이 박사는 한 달 전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이화장에 칩거하고 있는 상태였다. 얼핏 장난전화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윤 기자는 며칠 전부터 주한미국대사관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 박사 망명설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비록 정치부가 아닌 사회부 기자였지만 직감적으로 “한 번 부딪쳐 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윤 기자는 사진부 기자와 함께 취재차량에 올랐다. 차량에 붙은 신문사 깃발을 떼고 이화장으로 향하기 앞서 광화문 동아일보사에 들러 게시판을 확인했다. 다행히 이 박사의 망명과 관련된 기사는 없었다. 허탕 아니면 특종인 상황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역시 망명설에 관한 첩보를 입수했으나 설마 바로 그 주말에 떠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윤 기자 일행을 태운 차가 이화장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 무렵이었다. 그는 이화장 옆 구멍가게에 숨어 잠복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화장에 검정색 세단 한 대가 당도했다. 김 기자는 특종에 관한 확신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침 6시 반이 되자 흰 중절모를 쓴 이승만 박사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전용차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박사를 태운 차량은 곧바로 이화장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4·19로부터 40여 일이 지난 늦봄이었다.
윤 기자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박사는 비행장으로 가는 도중 취재차량이 뒤따라온다는 보고를 받고 ‘그냥 놔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고 당시 비화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고국을 떠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윤 기자는 이 박사 내외가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쫓아가 호기롭게 물었다. “국민에게 한 말씀 남겨 주십시오.” 그러자 이 박사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 말을 하면 내 생각이 달라질는지 몰라. 다 이해해주고 이대로 떠나게 해주오”라고 대답했다. 부인은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Nothing. But I love Korea(아무 말도. 다만 전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이승만 내외가 휴대한 짐은 중형 보스턴백 4개와 케이스 없는 타자기 한 대가 전부였다. 8시 45분, 이 박사를 태운 비행기는 환영 인파 하나 없이 쓸쓸하게 하와이 호놀룰루를 항해 이륙했다.
이날 윤 기자가 쓴 “이 박사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 기사는 그야말로 세기의 특종이었다. 해당 기사는 AP, UP, 로이터 등 외국통신사를 통해 전세계로 타전됐다. 당시 정부당국은 ‘휴양차 떠난 것’이라고 수습에 나섰다. 실제 이승만 박사는 망명 이후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 정권의 강경한 거부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채 결국 90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윤 기자는 책에서 “이 박사 망명 특종 때문에 나는 유명세를 타고 인정받는 기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실제 그는 보도 이후 동아일보에 스카우트됐고 이후에도 여러 번 특종의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언론 유관 기관(일민문화재단 이사장)에 재직하고 있다.
#제재형 “영원한 정치부 기자”
그는 30년 기자 생활 중 가장 파란만장한 페이지로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1967년을 꼽는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제치고 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해,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총선은 당시 여론과는 달리 공화당이 175석 중 130석(74.3%)을 차지했다. 수도권 지지율을 점령하다시피 한 야당(신민당)은 전국구 17석을 더해 겨우 4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공화당에 참패한 신민당 의원들은 7대 총선을 ‘6·8부정선거’로 규정하며 의원등록 및 국회출입 거부를 선언했고 이 때문에 국회는 반년 가까이 파행을 거듭했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진화에 나서며 국회 등록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도 야당이 없으면 국정감사와 예산 심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대 총선을 앞두고 여론은 야당에 국회의석을 많이 줘야 공화당의 횡포와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는 쪽이 우세했다. 갈수록 여론이 불리해지자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SOS를 요청했다. 선거를 한 달여 앞둔 5월 중순 박 대통령은 공화당에서 마련한 1차 유세 일정에 따라 목포로 내려가 “여당후보를 밀어달라”고 호소했다. 가장 먼저 목포를 선택한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야당의 다크호스 김대중 후보의 기세를 꺾어놓기 위해서였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 여당 지원유세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최초 보도한 이가 제재형 기자다. 당시 선거법은 “특정정당을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특정후보를 당선 또는 낙선되게 할 목적으로 찬성 또는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으로 있을 당시 중앙선관위 위원장에게 질의서를 보냈고 받은 답변서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그가 보낸 질의서는 “비록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에 여당 후보에 대한 지원유세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에 중앙선관위는 전체 회의를 거쳐 “그렇다”는 답변과 함께 그 이유를 담은 답변서를 보도자료로 배포했다. 이는 현직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을 지적한 초유의 일이었다.
이튿날 이 같은 내용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됐다. 공화당은 핵폭탄을 맞았고 박 대통령은 목포에서의 지원유세 한 번을 끝으로 청와대에 발이 묶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회사로 출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정권이 왔다 갔다 하는 중대한 사안에 사장의 허락도 없이 질문서를 보내고 기사를 실었다는 문책이었다. 제 차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 놈의 기자가 사장 결재 받고 취재한답니까?” 그리고 “두말 말고 사표 내!”라는 사장의 말에 전광석화처럼 사표가 든 봉투를 내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7대 총선을 맨 앞에서 지켜본 그는 “국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군사독재 정권과 공화당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투영하는 징조로 보였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 제재형 기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의 펜끝을 거두지 않았다. 한 월간지에 박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망국도배’에 비유하기도 했다. |
제 기자의 용기 있는 발언은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과오를 고백하게 만들기도 했다. 1962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TV로 생중계되는 연말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이후락 공보실장이 각본대로 질문과 대답을 이어나갔다. 이때 제 기자는 “뒷자리에도 발언권을 달라”고 소리쳤다. 박 대통령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발언권을 주자 그는 “6·10통화정책은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만일 실패했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박 의장의 대답은 예상 외로 호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6·10통화정책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통화 개혁을 주도했던 최고위원 유원식 장군이 직에서 물러났다.
제재형 기자는 30년 가까이 정치권 안팎을 취재하며 권력 무상을 온몸으로 절감했지만 결코 정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등 돌리지 않았다. 이번 책에서도 “의회 민주주의는 매우 비능률적이고 나쁜 제도이지만 이보다 나은 제도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의회 정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니 그는 천상 기자인 모양이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