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면계약 사태로 코트를 떠났던 ‘천재 가드’ 김승현 선수가 서울삼성 유니폼을 입고 제2의 농구 인생을 시작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리터칭=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그랬었죠. 전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도마 위에 올려졌었어요. 제 키(178㎝) 때문이었는데요, 과연 이 키를 갖고 대학에 진학해서 제대로 농구를 할 수 있을까? 대학에 가서도 또 그 키 때문에 프로 진출 후, 과연 김승현의 농구가 잘 먹힐까? 하는 의문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자신이 있었어요. 비록 키는 작아도 좋은 실력을 갖춘 선수들과 함께한다면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만약 키가 10㎝만 더 컸더라면 김승현의 농구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을까요? 농구도 훨씬 더 잘했을 것이고요. 어디를 가도 떳떳하게 고개 들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큰 사건을 겪은 이후론 대인기피증 같은 게 생겨서 가급적 외출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외출할 일이 있으면 모자부터 찾게 돼요.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모든 일이 정리가 됐지만,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의 감정은 쉽게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아요.
―데뷔 당시 ‘제2의 강동희’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어요. ‘천재 가드’란 타이틀도 함께 따라다녔죠.
▲전 ‘천재 가드’보다 ‘제2의 강동희’란 별명이 더 좋았어요. 제가 강동희 선배님을 정말 존경했거든요. 그 분은 저한테 큰 산이었어요.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그 분의 농구를 보면서 자랐고, 그 분을 닮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 농구는 경기의 흐름이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선배님은 그런 흐름을 콕콕 짚어주는 스타일이세요. 한마디로 노련함의 대가이셨죠. 물 흐르듯이 농구를 한다는 말은 그 분한테 해당되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기가 막힌 패스를 하시는 분이죠.
―그렇게 존경하는 분 밑에서 농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현실로 이뤄질 수 없었지만 가상으로 함께 농구를 하는 그림도 많이 그려봤어요. 감독님 밑에서 농구를 했더라면 굉장히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만약 제가 다시 코트로 돌아오면서 원주 동부로 가고 싶다고 말했더라면 다른 팀에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동부의 (김)주성이 형이랑 제가 대표팀 시절, 절묘한 호흡을 보여준 걸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결코 가능한 시나리오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 지난 12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서울 삼성 썬더스와 부산 KT 소닉붐의 경기에서 삼성 김승현 선수를 KT 송영진, 표명일, 로드 선수가 에워싸고 있다. 사진제공=KBL |
▲얼굴 생김새는 제가 좀 낫지 않을까요(웃음)? 선배님, 죄송합니다. 농구로 봤을 때 제가 선배님을 쫓아갈 수는 없고요, 다만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창의적인 패스를 하려 했다는 점은 같다고 생각해요.
―프로 데뷔 첫 해에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했어요. 한마디로 ‘김승현의 해’였다는 얘기겠죠?
▲2001-2002 시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어요. 시합만 나가면 이겼고 그러다보니 시합 나가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당시 전희철, 김병철 선배들을 비롯해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용병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굉장히 기뻤습니다. 잘나가다보니 이상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다른 팀 선수들로부터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천재 가드’라고 불리는데, 솔직히 자신을 천재형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노력형이라고 보나요?
▲흔히 가드는 타고난 게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전 타고난 게 없어요. 타고난 걸 굳이 표현한다면 10% 정도? 나머지는 모두 노력의 결과물들입니다.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남들과는 다른 농구를 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운동을 했고, 체육관에서 지쳐 쓰러져 잠들 때가 많았어요. 뭔가 한 가지에 몰두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서 농구에 더더욱 미쳐있었던 것 같아요.
―농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그 반대의 시절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프로 데뷔 후 6~7년 동안은 굉장히 행복했었죠. 그러다 허리 디스크가 터지면서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게 한 3~4년 됐어요. 이상하게 전 굴곡이 심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농구의 정점을 찍었다가 최근에 바닥까지 내려왔었고 이제 조금씩 다시 올라가고 있는 중이고요.
―농구 코트를 떠나 있을 때,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내가 다시 농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만약 농구를 못하게 된다면 난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었고요. 사람은 자기가 제일 잘하는 걸 해낼 때 멋있어 보이잖아요. 정말 갈등과 번민의 나날이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농구를 다시 시작했을 때와 농구를 안 했을 때의 제 모습을 떠올려봤는데, 제가 다시 농구를 하는 게 맞더라고요.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농구판으로 돌아가려다보니 많은 걸 포기해야 했는데, 그렇게 큰 돈을 버리고 돌아가는 게 밖에서 보는 것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느낀 점이라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과도 바꿀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확신했고, 이제야 그걸 되찾았기 때문에 그 돈에 대해선 더 이상 미련도 욕심도 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농구를 하지 않는 동안 사회 경험과 인생의 쓴맛을 모두 맛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평생 변호사 만나서 상담하고 재판에 나갈 일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짧고 굵고 진하게 사회 경험을 한 거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더 나이 먹어서 이런 일을 겪었더라면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훈련을 했어요. 체육관 훈련은 아니었지만 웨이트트레이닝도 하고 산에도 오르고 자전거도 타면서 몸을 망가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매일같이 숙소와 체육관을 들락거렸던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모든 게 헛헛해졌을 것 같아서요.
▲전 갈등을 하면서도 다시 코트로 돌아갔을 때 체력이나 기량이 떨어져서 운동을 못하는 상태가 되지 않으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힘들다고 폐인처럼 지내면 나중에 회복불능의 상태가 될 수 있잖아요. 마음이 아파도, 갈기갈기 상처가 나서 꿰맬 수조차 없을지라도 운동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낚시를 하러 가거나 골프를 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습니다. 체육관 훈련이 하고 싶어서 모교인 동국대에서 훈련할 계획도 잡았다가 당시 김승현 하면 ‘돈만 밝히는 선수’로 낙인이 찍힌 상태라 후배들 앞에도 나설 수가 없게 되더라고요. 후배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운동에만 집중할 수가 없어 결국 모교 방문도 못했어요.
―힘들었던 여러 가지 부분들 중에서 가장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김승현이란 선수를 ‘돈’으로만 연결시킨 사람들입니다. 전 그동안 무릎을 다쳐도 재활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뛰었어요. 허리디스크가 터졌는데 한 달도 못 쉬고 코트에 섰어요. 팀 성적 때문에 몸 관리를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내 몸을 돌보기보단 팀을 위해 희생했고, 고통을 참고 정말 열심히 뛰었는데 저한테 돌아온 건 큰 폭의 연봉 삭감과 타락의 길로 인도한 분위기였죠.
―결국엔 구단과의 이면계약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는데요, 그 결과를 통보받았을 때, 말로 표현 못할 회한이 밀려들었을 것 같아요.
▲재판에서 이겨 기분 좋았다기보단, 농구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습니다. 제가 이면계약을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구단에서 이렇게 해주겠다는 제시를 받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구단에서 먼저 그 약속을 파기했고, 열심히 안 뛰었다고 연봉을 삭감한 것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선수였다고 해도, 설령 그런 이면계약이 KBL의 룰을 어기는 부분이었다고 해도, 구단에서 그런 계약 내용을 제시했더라면 거절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이번 일을 통해서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구단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란 점을요.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팀 성적만 좋아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웃음). 선수들한테 삼성 구단의 시스템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게 완비돼 있고, 모든 게 선수 위주로 돌아갑니다. 단, 김승현이 삼성에 입단했다고 해서 팀 성적이 단숨에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던 팬들한테는 대단히 죄송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몸 상태가 85% 상태는 회복되었거든요. 올 시즌은 적응기라고 생각해주시고, 다음 시즌에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입니다.
김승현은 은퇴 후 지도자를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 시즌 신인왕을 다투는 3인방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의외로 꼼꼼한 체크포인트가 뒤따랐다.
“먼저 KGC 오세근은 기량이나 파워, 스피드 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선수인데요, 앞으로 한국 농구를 짊어지고 갈 선수라면 스타의식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SK 김선형의 탄력은 정말 탐이 날 정도예요. 반면에 슈팅력을 좀 더 보완해야 합니다. 슛 연습을 많이 하는 수밖에 없어요. (최)진수요? 진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지금보다 체중을 10㎏ 정도 늘려야 해요. 진수의 최대 약점이 몸 싸움이잖아요. 그 점만 보완한다면 무서운 선수로 성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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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많다? “아는 여자 열 명도 안 돼요”
신인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한 김승현. 워낙 잘 나가는 선수이다보니 오해와 질투, 시기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었다. 김승현을 둘러싼 소문과 진실을 알아봤다.
―김승현은 감독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네버! 노우! 왜 그런 말이 나오죠? 저처럼 감독님 말씀을 잘 듣는 선수도 없는데요. 단지 전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는 스타일이에요. 감독님 입장에선 그런 모습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제가 인연을 맺었던 감독님들과는 잘 지낸 편이거든요. 전, 정말 감독님 말씀을 잘 따르는 착한 선수입니다.
―김승현은 코트에서 더티한 플레이를 한다?
▲오히려 그 반대죠. 상대 선수들이 절 막으려고 이상한 파울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 감정을 흔들려고 더 그러는 선수들도 있고요. 동업자 정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치지 않고, 깔끔한 플레이를 통해 멋진 경기를 선보인다면 농구의 인기도, 자신의 연봉도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요?
―김승현한테는 여자가 많다?
▲노! 전 아는 사람들하고만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절 보지도 않은 사람들, 아니 잠깐 인사만 나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김승현과 사귀었느니, 만났느니 하는 얘기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찾아내보면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요. 전 성격상 여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요. 아마 지금 제가 알고 있는 여자라면 누나들 포함해서 10명 정도도 안 될걸요?
―김승현은 클럽을 좋아한다?
▲클럽은 몇 번 가봤어요. 거기서 나오는 음악이나 분위기를 좋아했었죠. 그러나 극히 드문 일이에요.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더욱이 큰 사건이 있은 후론 더 자제하는 편이에요. 제가 자유분방한 이미지이다보니 그런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 전 은근히 정적인 걸 좋아해요. 낚시를 하게 된 것도 제 성격의 일면이 포함된 거고요. 이제 저도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 살이거든요. 클럽을 좋아할 나이는 지났잖아요.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