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현의 표정이 밝다. 지난해 라쿠텐 2군 소속 선수로 봤을 때와는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이다. 올해 국내 리그에서의 활약이 기대된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그래도 김병현의 표정은 밝다. 지난해 일본 라쿠텐 2군 소속 선수로 센다이에서 봤을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었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그였다. 이젠 선수들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선수들과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며 소통하고 있는 김병현은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 애리조나 서프라이즈에 위치한 넥센 훈련장에서 김병현을 만났다.
―연일 인터뷰를 하려니 피곤할 것 같다. 세 번째 (훈련장에) 찾아와서 ‘겨우’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됐다.
▲훈련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다 보니까 이런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욱이 이젠 인터뷰도 할 만큼 했는데, 더 이상 나올 얘기도 없다(웃음). 앞으로는 운동을 잘해서 인터뷰해야 하는데…. 하지만 이전에는 구단이나 언론에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언론과의 소통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독불장군처럼 혼자 생각만 하고 사는 건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 것 같다.
―애리조나를 찾은 기자들마다 ‘김병현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실제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에 대해 잘 아시지 않나. 난 이전도 또 지금도 그대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달라졌다느니, 친절해졌다느니, 잘 웃는다느니 하는 얘기를 한다. 한국에 왔다고 해서 특별한 변화를 주지 않았다. 아니 원래 내 자신은 환경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단지 이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나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다 보니 그걸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얘기하고 싶다.
―현재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
▲지금 롱토스를 시작했다. 훈련 프로그램도 다 따라하고 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는데 잘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했을 때는 약간 뻐근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팀 훈련, 단체 훈련이 그리웠었다.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농담하고 코치님하고도 옛날 얘기하면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한국에서 훈련을 계속하다가 미국 LA로 출국했었다. 당시 기사에는 김병현 선수가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보도되었다. 그때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고 싶다.
▲미국 들어가기 전에 넥센 이장석 대표님이랑 두 번 정도 만났었다. 그래도 미국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될지는 몰랐다. LA에서 혼자 훈련을 하면서 공 받아줄 사람이 필요해 사람을 구해서 캐치볼을 했다. 순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미국에서 그러고 있어봤자 아무런 발전도 기대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괴감이 생겼다. 그 후 이장석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흔쾌히 받아주시더라. 결정하기 전까진 굉장히 힘들고 마음이 복잡했는데, 막상 결정이 되니까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밖에서 들었던 넥센이나 이장석 대표님에 대한 얘기와 내가 직접 만나 뵈었을 때와는 차이가 컸다. 믿고 신뢰할 수 있었다.
▲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
▲모든 건 환경이 아닌 내가 던지고 싶은 ‘공’에 기인한다. 일본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어느 정도 내 공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조금씩 한국 야구에 대해 생각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2년 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마이너리그 팀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가 얼마 안 가 팀을 나온 적이 있었다. 만약 그때 지금의 몸 상태였다면 난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것이다. 즉 나에게 있어서 한국 무대는 갈 곳 없어 마지막에 선택하는 리그가 아닌 내가 잘 던질 수 있는 공을 던지게 될 때 찾아가는 리그였다.
―그렇다면 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행을 꺼렸다는 말인가?
▲3년 동안 야구를 쉬다가 마이너리그 팀에서 훈련을 하니까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었다. 당시 제대로 된 코치 밑에서 내 몸을 만들고 싶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내가 원했던 부분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약 해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 후 일본 라쿠텐에서 알게 모르게 자존심도 상하고 수모도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공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몸 상태가 좋아지면서 한두 번 내 맘에 드는 공을 던지기도 했다. 즉, 내가 원하는 공을 던질 수 있을 같아서 무료하기 짝이 없던 일본 생활을 견뎌낸 것이다.
―일본에서 파친코를 자주 접했다고 들었다. 김병현과 파친코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 그림인데 말이다.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시작한 취미 생활이다. (임)창용이 형이 센다이로 원정경기 왔을 때 같이 식사를 했는데 파친코를 통해 시간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더라. 등판을 못하다 보니 야구가 항상 일찍 끝났다. 가족들도 없는데 그 남은 시간을 뭘 하고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그때 파친코를 알았고, 심하게 했을 때는 하루에 9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잡아당기기만 했었다. 담배 연기를 마시면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니까 다크서클이 눈 밑으로 내려오더라. 반면에 파친코에서 좋은 분도 만났다. 매일 그곳을 이용하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친해지면서 그 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일본을 떠나기 직전에 그 할아버지에게 야구 카드를 드리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짧게 말씀드렸다. 그냥 ‘백수’인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야구선수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던 파친코 할아버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일본 라쿠텐 골든이글스로부터 받았던 연봉이 기사마다 다르게 전달되고 있다. 실제 연봉은 얼마였나.
▲일부에선 내 연봉을 3300만 엔으로 알고 있던데 1200만 엔이 내 몸값이었다. 처음 라쿠텐과 연봉 얘기를 나눌 때 그들이 먼저 나한테 묻더라. 얼마를 받고 싶은지를.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 팀의 최저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고. 1200만 엔은 팀의 최저 연봉 액수였다. 그런 선수에게 퀵모션이 느리다 어쩌다 하면서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일단 마운드에라도 올려놓은 다음 공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달라고.
―지난해 라쿠텐 2군에 있으면서 투수코치와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작년 일본 센다이에서 기자를 만났을 때 투수코치가 김병현 선수의 멱살을 잡으면서 화를 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기사화되는 걸 원치 않아 쓰지 못했었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생기는 모처럼 만의 등판 기회를 얻고 마무리로 마운드에 올랐다. 안타를 얻어맞고 만루가 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나름 괜찮은 피칭을 함으로써 경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투수코치가 나한테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통역한테 물어봤다. 코치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를. 통역이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기에 내가 한국말로 “왜? 뭐가 문제인데”라고 말했다. 순간 그 코치가 내 멱살을 잡더니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순간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상황인가 싶었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구단에 날 내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무단이탈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에선 시즌 마칠 때까지 얌전히 있어주길 바랐다. 만약 이전의 나였더라면 그냥 뛰쳐나왔겠지만 나한테는 아내와 딸이 존재한다. 가족들한테 상처주기 싫어서 시즌 마치는 날짜를 손꼽아 세어가며 시간을 때웠다.
▲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김시진 감독님이 정말 많은 배려를 해주시면서 마음 편히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게끔 도와주신다. 난 지금 당장이라도 등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감독님께서는 5월 정도를 생각하시는 것 같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추운 날씨에 던지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팬들은 벌써부터 박찬호 선수와의 ‘메이저리그 출신 대결’, 서재응 선수와의 ‘광주일고 출신 대결’ 그리고 두산 김선우 선수와의 ‘형제 대결’을 그리며 성사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하,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문제인가. 우선 피칭 들어가면서 타자들이랑 상대해봐야 감이 잡힐 것 같다. 난 투수와의 대결보다는 한국의 타자들이 어떤 스타일인지를 빨리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 내 공이 한국 선수들에게 어떻게 먹히는지 알고 싶다.
―넥센과 계약을 맺으면서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시키지 않는 조건을 먼저 제시했다고 들었다. 다분히 KIA 타이거즈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내가 타이거즈의 빨간색 유니폼을 좋아하긴 하지만 입단하기 전부터 트레이드 얘기가 거론되는 게 싫어서 먼저 이장석 대표팀께 부탁드린 것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건 내 야구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어떤 팀에서 내 야구를 찾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소속은 넥센이고, 방황하던 날 받아준 팀이기 때문에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
김병현에게 자신의 야구를 찾는 데 있어 서른세 살이란 나이가 많은 나이인지, 적은 나이인지를 물었다. 김병현은 “우리팀 투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편이고 어떤 선수는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팬이었다고 말한다”면서 “마흔 살의 박찬호 선배도 열심히 뛰고 계시는데 나 또한 내 야구든, 그들의 야구든,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질 수 있도록 이곳에 모든 걸 걸고 싶다”라고 설명한다.
미국 애리조나=riveroflym@ilyo.co.kr
ML 안 갔다면 야구 더 잘했을 거야
‘내가 만약’이란 주제어로 김병현과 짤막한 인터뷰를 했다.
―내가 만약 1999년 미국 진출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래전부터 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계속 한국에서 야구를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실력을 갖추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체계적으로 야구를 배우지 못한 부분이 내 공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믿는다.
―내가 만약 월드시리즈에서 우승 경험이 없었다면?
▲그 당시에는 우승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단지 경기에서 이겨야 하니까 열심히 던졌을 뿐이다. 따라서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의 유무가 내 인생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내가 만약 선발 보직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순간 마무리를 맡으면서 내 폼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선발만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만약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매일 놀았을 것이다. 좀 더 방황을 많이 했을 것이고. 야구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도 결혼은 큰 영향을 미친다. 불편함보다는 감사함, 고마움, 든든함이 더 존재한다. 나한테 가정이란 존재는.
―내가 만약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좋은 공을 되찾는 데 있어서 일본 생활은 분명 큰 도움이 됐다. 만약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왜? 내 공을 찾지 못해 계속 헤매고 있었을 테니까(웃음).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