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부조작 ‘청정지대’라고 자부하던 프로야구마저 팬들을 배신한 것일까. 승부조작 비리가 스포츠 전반으로 번질 태세다. |
“프로야구는 예외일 겁니다.” 지난해 5월 프로축구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는 야구에서 승부조작이 어려운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축구는 골키퍼가 일부러 공을 놓치면 승패가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야구는 특정 포지션 선수 혼자 승패를 결정지을 수 없다. 가령 투수가 일부러 공을 못 던져도 타자가 못 치면 그만이고, 일부러 수비 실책을 범하면 당장 다른 야수로 교체된다. 둘째, 축구는 심판이 광범위한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며 선수들을 봐야 하지만, 야구는 심판이 포수 바로 뒤에서 경기를 관찰한다. 투수와 포수, 타자가 조금만 이상해도 심판이 금세 알아차린다. 셋째, 축구는 과거부터 승부조작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야구는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의혹이 제기된 바 없다. 하다못해 뜬소문도 없었다.”
그로부터 9개월이 흐른 지금. 프로야구계는 승부조작 파문으로 벌통을 쑤신 듯 시끄럽다. ‘승부조작 청정지역’으로 자신하던 프로야구계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검찰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2월 13일 대구지검은 지난해 5월 프로축구 K리그 승부 조작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브로커 김 아무개 씨를 수사했다. 검찰 관계자는 “김 씨가 순순히 자신의 여죄를 자백했다”며 “조사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을 폭로해 우리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바로 김 씨가 프로야구의 승부조작 의혹을 폭로한 것이었다.
실제로 김 씨는 검찰 조사에서 “또 다른 브로커 강 모 씨가 프로야구 등의 승부조작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며 “강 씨로부터 프로야구 경기에서 ‘첫 회 볼넷’ 등을 놓고 2명가량의 현역 투수들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소릴 들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김 씨가 승부조작에 가담한 구단과 선수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자 즉각 수사에 나섰다. 언론 역시 검찰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바탕으로 승부조작 가담 의혹에 휩싸인 구단과 선수의 실명을 전격 공개했다.
▲ 승부조작 의혹이 불거진 LG 박현준(왼쪽)과 김성현. |
LG의 백순길 단장 역시 “두 선수가 승부조작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접촉했다고 주장한 브로커의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고 했다”며 “현재로선 브로커의 진술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LG의 바람과는 반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브로커 강 씨는 검찰 수사과정에서 “지난해 김성현에게 첫 이닝 볼넷을 기록하면 수백만 원의 사례금을 주겠다”며 경기조작을 제안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강 씨의 제의를 김성현이 받아들이고, 실제 첫 이닝 볼넷을 기록했다면 LG는 야구단뿐만 아니라 모그룹까지 극심한 이미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수도 다른 종목의 예를 참고한다면 영구제명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과연 프로야구 승부조작이 사실이라면 LG에만 국한된 것이냐는 것이다. 검찰의 정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 확언할 수 없지만, 야구계 안팎에선 “LG 선수의 승부조작이 사실이라면 다른 구단 선수들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자는 지난해 10월 한 제보자로부터 프로야구 승부조작 제보를 받았다. 제보자는 “프로축구의 승부조작이 승패에 국한된다면 프로야구는 승패와 관계없이 매 이닝 플레이마다 경기조작이 광범위하게 이뤄진다”고 털어놨다.
당시 제보자가 언급한 프로야구 경기조작의 대표적 방법이 초구 볼카운트였다.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에선 야구경기가 시작하면 첫 이닝 초구 볼카운트를 맞추는 베팅이 실시된다. 초구가 볼이냐, 스트라이크냐에 따라 돈을 딸 수도, 잃을 수도 있다. 베팅 사이트 이용자들은 야구기록을 토대로 제구가 좋은 투수일 경우 초구 스트라이크에 돈을 건다. 언뜻 야구기록에 해박한 사람일수록 돈을 딸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브로커들이 선수들을 포섭해 초구 볼을 던지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브로커들은 초구 볼카운트 조작에 혈안이 된 것일까. 돌아온 답은 “초구가 볼이라고, 피안타율이 극도로 높아진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승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데다 심판과 코칭스태프, 팀 동료로부터 별다른 의심도 받지 않는다”였다.
제보자는 덧붙여 “투수뿐만 아니라 타자도 경기조작에 관련돼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한술 더 떠 “브로커가 직접 선수를 포섭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라며 “브로커가 친분이 있는 선수를 통해 동료 선수를 만나 은밀히 경기조작을 제안하는 게 관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제보자는 브로커와 ‘친분이 있는 선수’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선수의 포지션과 그가 속해 있는 복수의 구단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이다.
당시 기자는 제보 내용에 반신반의했다. 프로야구에 승부조작이 횡행한다는 제보도 그렇고, 그가 지목한 복수의 구단들 투수들의 초구 볼 비율도 다른 구단에 비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7개월이 흐른 지금, 제보자의 제보 대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 문제는 현재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온 구단명과 당시 제보자가 귀띔한 구단명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만약 검찰 수사와 제보자의 제보가 사실이라면 최소 3개 구단 이상이 승부조작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번 프로야구 승부조작 의혹은 프로축구와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먼저 프로축구처럼 승패조작이 아니라 플레이조작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모 야구해설가는 “승패조작보다 플레이조작이 소극적 조작일지 몰라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더욱 지능적인 조작일 수 있다”며 “그만큼 은밀하게 경기조작이 이뤄졌다는 뜻일지 모른다”라고 씁쓸해했다.
프로축구 승부조작 때와 같은 면도 있다. 검찰의 수사방식이다. 13일 검찰이 브로커 김 씨의 진술을 토대로 프로야구의 승부조작 가능성을 제기한 이후, 언론은 연일 검찰 관계자의 말을 빌려 특정구단의 특정선수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 내용만 본다면 LG의 박현준과 김성현은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피의자로 확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검찰은 공식적으로 김 씨의 진술이 사실임을 공표한 바 없다. 정확한 사실관계와 객관적 증거를 확보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브로커의 진술을 토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겠다는 소식만 전해지고 있다.
구단들이 검찰을 향해 “특정구단, 특정선수의 실명을 공개하는 건 엄연한 피의사실 공표”라며 “검찰이 무슨 이유로 이렇듯 여론몰이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LG 관계자는 “실명이 공개된 박현준과 김성현뿐만 아니라 동료 선수들도 죄인이 된 듯 몸을 한껏 낮추고 있다”며 “차후 박현준과 김성현이 무혐의로 밝혀지면, 이 선수들의 실추된 명예는 어디서 회복해야 하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 있는 야구인들은 “검찰 수사 결과 혐의사실이 드러난 선수들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지만, 구체적 정황이나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선수들을 죄인 취급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야구계 인사들은 KBO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모 야구인은 “KBO가 ‘절대로 프로야구에서 승부조작은 없다’는 결백론만 내세우거나, ‘경기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은 영구제명하겠다’는 식의 엄포만 놓고 있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야구인은 “그보단 승부조작 의혹에 대해 KBO가 앞장서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서 “차후 승부조작 재발방지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게 KBO가 해야할 일”이라고 조언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 중·고교 야구에서 ‘져주기’ 게임에 익숙한 선수들. 따지고 보면 승부조작은 비일비재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떡잎부터 그걸 보고 자랐으니…
프로야구 승부조작 의혹은 갑작스레 제기된 사건이다. 프로축구의 승부조작이 다른 스포츠로 비화하며 프로야구에까지 불똥이 튄 셈이다. 하지만, 많은 야구인은 “야구계의 승부조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모 원로 야구인은 “아마추어 야구계에선 매우 오래전부터 승부조작이 있어왔다”고 털어놨다.
사실이다. 프로야구 승부조작이 승패보다 초구 볼카운트를 비롯해 각 플레이의 인위적 조작에 집중한다면, 아마추어 야구계의 승부조작은 오직 승패다.
모 고교야구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중·고교 야구계의 승부조작은 최근까지 횡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부조작을 ‘범죄’로 인식하는 지도자는 드물다. 일종의 관행 혹은 품앗이로 인식한다. 2010년을 예로 들자. 당시 고교야구는 지금처럼 주말리그가 아니었다. 한해 4개 전국대회와 각 지방대회가 열렸다. 대학 특기생 자격을 얻으려면 소속 야구부가 전국대회 8강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 전국대회 8강에 드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승부조작이 발생했다. 이미 전국대회 8강에 진출한 학교가 다른 대회에서 약체 학교에 일부러 지는 것이었다. ‘고의 져주기 경기’를 통해 약체학교는 전국대회 8강에 오르고, 대학 특기생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국대회 성적이 나쁜 학교의 감독은 ‘져주기 경기’를 통해 감독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져주기 경기’는 주로 친분이 두터운 고교 감독끼리 품앗이 차원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주말리그가 도입된 지난해부터는 어땠을까. ‘고의 져주기 경기’가 사라졌을까. 아니다. 지난해에도 ‘져주기 경기’는 계속됐다. 지난해 모 대회에서 맞붙은 A 고와 B 고의 경기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A 고는 B 고에 패했다. 객관적 전력은 A 고가 앞섰지만, B 고는 경기 후반에 집중타를 몰아치며 A 고에 역전승했다. B 고는 이 경기 승리를 발판 삼아 승승장구하며 8강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A 고가 고의로 B 고에 졌다”는 소문이 야구계에 파다하게 퍼지며 A 고 감독은 사퇴 위기에 몰렸다.
당시 A 고 감독은 “져주기 경기를 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를 믿는 야구 관계자는 거의 없었다. 사태가 커지는 걸 염려한 A 고는 감독에게 구두 경고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여전히 이 감독은 A 고를 이끌고 있다.
모 고교야구 감독은 “감독끼리의 승부조작 말고도, 심판이 개입한 승부조작이 더 문제”라며 “몇몇 심판이 감독들로부터 뒷돈을 받고 특정팀에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라고 분개했다.
현직 아마추어 심판은 “감독과 심판 사이의 뒷돈거래는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이 심판이 밝힌 뇌물 커넥션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요 경기를 앞두고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 회의를 소집해 돈을 거둔다. 모인 돈은 감독에 의해 심판에게 전해지고, 경기가 시작하면 심판은 뇌물을 전달한 팀에 더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
모 고교 감독은 “상대 팀 투수의 스트라이크를 서너 개 정도 볼로 판정하고, 세이프를 2개 정도 아웃으로 선언하면 아무리 강팀이라도 약팀에게 질 수밖에 없다”며 “승부조작이 탄로 나지 않으려고 심판들의 편파판정 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 야구해설가는 “프로야구 승부조작은 아마추어 승패조작에서부터 기인했다”고 지적했다. “유년시절부터 아무 죄의식 없이 승패조작에 나서는 어른들을 보고 자란 선수들은 브로커가 승부조작을 제의했을 때도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反)스포츠적 행동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프로야구의 승부조작을 뿌리 뽑으려면 아마추어 야구계의 승패조작부터 근절해야 한다.”
한 원로야구인은 뼈 있는 조언을 했다.
“한국 야구계는 ‘승부조작 청정지역’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고, 그런 믿음으로 승부조작을 정당화했을 뿐이다. 이제 한국 야구계가 할 일은 솔직하게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승부조작의 어두운 그림자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는 것이다. 각 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물쩍 넘어갔다간 또 다시 승부조작 파문에 휩싸일 것이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