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애리조나 글렌데일에 위치한 체육관에서 UFC 타이틀 도전을 앞둔 벤 헨더슨을 만났다.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그의 인생은 웃음과 감동으로 점철돼 있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안녕하세요. 먼저, 챔피언 타이틀매치를 앞두고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체육관이 굉장히 크고 멋진데요, 평소 여기서 훈련을 하시나요?
▲그렇죠. 5년 전에 이 체육관을 찾았을 때의 전, 청소하는 사람이었어요. 바닥도 닦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그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었죠. 그래야 체육관비를 내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여기 코치와 함께 동업해서 경영하고 있는 오너가 되었어요. 매우 기분 좋은 일이죠.
―한마디로 엄청난 신분상승인데요(웃음)? 챔피언 타이틀매치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어느 대회보다도 떨리고 긴장될 것 같은데,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그런데 전 모든 게임이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아마추어 때 처음했던 시합과 UFC 데뷔 후 처음 치렀던 시합이 저한테는 다 똑같았어요. 모든 시합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대회는 챔피언 타이틀이 걸려 있는 매치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 더 긴장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여느 게임과 마찬가지의 매치일 뿐이에요.
▲ 큰 시합을 앞두고 떨리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땀을 많이 흘렸다는 것.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아니요. 전혀요(웃음). 제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고 매일 힘든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되는 게 없어요. 만약 제가 훈련을 게을리 했거나 식이요법에 실패해서 살이 쪘다면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생기겠죠.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서 열리는 메인 이벤트라 더더욱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한국 팬들이 이번 매치에 굉장히 많은 기대를 갖고 계시리라 믿어요. 개인적인 희망이 있다면 인생에 한 번쯤은 한국 무대에서 경기를 치르고 싶다는 겁니다. 이번 일본 대회에는 (한국말로)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여러 이모님들이 직접 오셔서 경기를 지켜보실 거예요.
―라이트급 챔피언인 프랭키 에드가에 대해선 연구를 많이 하셨나요?
▲제가 처음 이 선수를 봤던 건 MMA 팬의 입장에서였는데, 지금은 도전자의 신분이 됐네요. 저를 도와주고 있는 코치들이 하루에 10번 이상씩 프랭키 선수의 경기 비디오를 분석하며 자료를 뽑고 있어요. 그 자료들을 토대로 훈련할 때마다 코치들이 프랭키 선수의 경기 패턴을 알려주고 저와 함께 프랭키 선수의 공격과 수비를 대비해서 대처 방안들을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희 코치들은 전문가잖아요(웃음).
―프랭키는 장기전, 체력전의 명수로 소문나 있어요. 자신 있나요?
▲비단 프랭키뿐만 아니라 어떤 경기라도 체력적인 면은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선수들이 상대를 초반에 쓰러트리고 승리를 쟁취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는 매우 쉽지 않아요. 저는 이미 두세 번 정도 5라운드까지 가는 장기전을 치렀기 때문에 체력면에선 자신이 있어요. 상황이 악화돼서 6, 7, 8라운드까지 가더라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다고 믿어요.
▲ WEC 라이트급 챔피언에 올랐을 당시 모습. |
▲신의 은총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저에게 가야 할 방향과 타이밍을 정확히 제시해주셨고 그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다른 선수들은 6~7경기를 치르고도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데 전 제 자신도 믿지 못할 정도로 빨리 올라왔거든요.
―격투기에 입문한 동기나 과정이 궁금해요.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꼭 배워야 한다고 해서 형이랑 같이 배웠죠. 대학교 다니면서 레슬링을 했어요. 레슬링은 야구나 축구, 미식축구처럼 협회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단, 아마추어 레벨의 레슬링을 할 수 있는 정도였죠. 제가 미국 1% 안에 드는 레슬러였고, 올림픽대회에 나갔더라면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졸업하고 나니까 그게 다더라고요. 그러다 운 좋게 MMA(종합격투기)라는 게 생겼고 미국 내에서 인기를 끄는 종목이 되었죠. 당시의 전 젊었고 활동적인 상태라 어느 시합에 나가도 이길 자신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MMA에 입문하기로 결정했던 거죠. 제 자랑이 심한 것 같지만(웃음), 데뷔전에서 모두가 놀랄 만한 승리를 거뒀어요. 그게 제 종합격투기 인생의 시작이었던 셈이죠.
―격투기라는 종목 자체가 어느 종목보다 힘들고 어려운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도중에 그만두거나 포기하고 싶었던 적 없었나요?
▲(조금 생각에 잠기다가) 아니요, 저한테 격투기는 어느 스포츠보다 공정하고 순전히 두 손과 맨몸을 통해 정정당당히 겨룰 수 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경쟁을 즐기고 있고 경쟁을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MMA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공정하고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멋진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그저 맨몸의 두 선수가 아무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팀이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 아무 것도 없는 옥타곤(케이지) 안에서 누가 더 강한가를 겨루는 스포츠이잖아요. 저는 그런 게임이 너무 좋아요.
―어머니 입장에선 아들이 피를 흘리고 링 위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셨을 때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대학 졸업 후 덴버에 있는 경찰 시험에 합격했었어요(벤 헨더슨은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했다). 경찰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뿌리쳤던 터라 어머니가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 제가 UFC에서 나름 성공을 거둔 후로는 가족 모두가 절 응원해주세요. 그래서 더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몸의 문신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어요. 특히 ‘힘’ ‘명예’라는 한글을 새겨 넣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힘’ ‘명예’는 제가 기도할 때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저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규칙과 규범들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힘과 명예는 저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인생의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격투기 선수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말해주실 수 있어요?
▲장점이라고 한다면, 우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행복하고요, 또 운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좋은 몸매를 가꾸는 것도 좋아요(웃음). 단점은 가끔 경기에서 맞을 때, 정말 큰 주먹들이 얼굴을 강타하면 기분이 안 좋아져요(웃음). 아주 많이 아프거든요.
―어머니가 시애틀에서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돈을 더욱 많이 벌면 어머니에게 큰 선물을 하고 싶다고요?
▲지금도 매달 현금을 드리고 있지만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면 어머니한테 차와 집을 장만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난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을 방문했어요. ‘코리안 좀비’ 정찬성 선수의 체육관에도 가봤는데, 한국의 체육관 시설이 생각 외로 열악하더라고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어머니가 계시는 시애틀과 덴버, 그리고 한국에도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세우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양반다리 자세를 풀지 않았던 벤 헨더슨. 인터뷰할 때의 웃는 모습과 격투기를 할 때의 성난 표정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인생이, 그의 목표와 희망이 너무 좋았다. 가슴에 진하게 와 닿을 정도로. 기자 신분으로 만난 선수였지만 앞으로 벤 헨더슨 경기를 볼 때 그의 응원군이 될 것만 같다. 그 정도로 그는 충분히 매력적인 선수였다.
미국 애리조나=riveroflym@ilyo.co.kr
▲ 벤 헨더슨과 어머니 김성화 씨. 김 씨는 아직도 시애틀에서 일을 놓지 않고 있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햄버거 대신 김치·불고기 먹였다”
벤 헨더슨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우여곡절로 점철된다. 주한 미군의 병사로, 문산과 비무장지대(DMZ)를 오가는 버스 안내원으로 근무하다 사랑에 빠진 부모는 1981년 결혼 후 콜로라도주 스프링스에 정착, 벤을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 김성화 씨(50)와 갓난아기 벤은 어떤 이의 축하와 위로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술에 빠져 사는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시애틀에 살고 있는 벤의 어머니 김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데다 말도 통하지 않았던 터라 당시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면서 “아기를 위해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남편이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남편이 술을 끊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감행했다고 한다. 주변 환경이 바뀌면 술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벤의 아버지는 가족을 등한시한 채 술만 마셔댔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이혼은 안 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남편과 이혼 후 하루에 두 군데에서 16시간씩 휴일도 없이 일을 했다. 주위에서 ‘일 벌레’라고 놀릴 정도로 힘들게 일을 했지만 정작 난 힘든 줄을 몰랐다. 새벽 한두 시에 귀가하면 잠도 안 자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 둘이 달려 나와 나를 포옹하며 얼굴을 비벼댔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이 나한테는 하루의 고달픔을 모두 해소시켜 주었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김 씨는 헨더슨 형제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 주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한국말은 물론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미국식 음식을 거부하고 정성이 깃들어진 한식으로 식단을 차려줬다. 지금도 돼지불고기와 김치는 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다. 또한 한국식 예의범절을 알려줘 아이들은 손님이 오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 ‘안녕하세요’를 외쳐야 했다.
무술을 접한 동기도 엄마 김 씨 덕분이었다. 김 씨는 두 아들을 태권도 도장에 다니게 했다. 벤은 타고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레슬링 선수로 성장했고, 워싱턴주에서 주최한 대회에 출전해 2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네브라스카의 다나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 범죄학을 전공한 벤은 대학 졸업 후 경찰에 합격하고 나서 격투기에 입문했다.
벤이 피 튀기는 사각의 링에서 욕설을 내뱉지 않고, 승리 후에도 상대방을 자극하는 세리머니를 하지 않는 예의바른 선수로 알려진 데에는 어머니 김 씨의 한국식 교육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헨더슨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보면 그의 애절한 한국 사랑이 느껴진다. 양쪽 몸통에 ‘힘’ ‘명예’ 그리고 양 어깨에 ‘전사’ ‘헨더슨’이라는 문신을 넣었다. 한글과 한인의 정체성에 각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엄마는 지금도 하루에 16시간씩 일하고 계시지만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강인한 한국 여성이다. 난 그런 엄마에게 UFC 챔피언 벨트를 채워드리고 싶다. 그게 지금 나의 꿈이다.”
오는 2월 26일 일본에서 열리는 UFC 라이트급 챔피언 도전자인 한인 2세 혼혈 파이터 벤 헨더슨의 각오가 인터뷰 후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