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가 찍어낸 코인이 자산 대부분, 고객 돈 건드리고 은폐…새 대표 “이런 완벽한 기업 운영 실패는 처음”
20대를 막 벗어났지만, 누구보다 자신만만했던 조만장자 샘 뱅크먼 프리드(SBF)가 무너졌다. 샘 뱅크먼은 1992년생으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인물이다. 샘 뱅크먼은 세계 3위 거래소로 꼽히는 FTX와 알라메다 리서치를 이끌면서 자산 4조 원 이상을 보유했다고 추정됐다. 올해 포브스 전 세계 부자 순위에 따르면 SBF는 66위에 올랐고, 부자 순위 500위 이내 인물 가운데 가장 어렸다.
야심만만한 SBF는 가상자산 업계에서 ‘뽀글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뽀글거리는 머리처럼 기성 질서와 차별되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SBF가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쳐도 엄청난 업적이 그의 후광이 돼주었다. FTX 붕괴가 있기 전까지는.
2019년 창업한 FTX 거래소는 짧은 시간에 거래량 순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한 거래소다. 거래량 1위인 바이낸스와 2위인 코인베이스를 바짝 뒤쫓았고 일부 지표에서는 코인베이스를 앞서기도 했다.
가상자산 업계 전문가 A 씨는 FTX 성공 배경으로 UI(사용자 인터페이스), UX(사용자 경험)를 꼽았다. A 씨는 “FTX는 다른 거래소보다 UI, UX가 편리했고 빨랐다. 투자자 사이에서는 ‘빠릿빠릿하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장점 때문인지 FTX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FTX에서 미국 다음으로 투자자가 많은 국가가 한국이다.
FTX가 상대적으로 편리한 서비스를 갖춘 건 SBF가 트레이더 출신이라는 배경도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다. SBF는 2014년 MIT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제인 스트리트 캐피탈’이라는 금융회사에서 ETF(상장지수펀드) 트레이딩 업무를 맡았다고 알려졌다. SBF는 2017년 아비트라지(무위험 차익거래), 마켓 메이킹(MM), 퀀트 트레이딩을 하는 알라메다 리서치를 창업한다. SBF는 알라메다로 큰돈을 벌었고 2019년 FTX 거래소를 창업해 성공하면서 자산도 치솟았다. 올해 SBF 자산은 약 40조 이상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최근까지 SBF 사업 모델은 FTX 거래소와 알라메다를 통해 각 가상자산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모델로 나뉘어 있었다.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만 해도 SBF가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 B 씨는 “알라메다에서 투자한 프로젝트가 잘못되더라도 거래소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SBF나 FTX가 부도날 생각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7월 23일 블룸버그에서 ‘FTX가 한국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 인수 협상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루나 사태 이후 가상자산 시장이 얼어붙는 상황에서 SBF는 오히려 공격적으로 인수합병에 나서고 있었다. 당시 자금난에 처한 가상자산 기업에 현금을 지원해주거나 인수해주는 방식으로 가상자산 제국을 확장하는 모습에서 부실을 떠올리기란 어려웠다.
또한 SBF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할 당시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아, 개인 기부금 규모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도 미국 민주당에 개인 기부금 규모 2위를 다시 한 번 기록했다.
잘나가던 SBF가 어려움에 부닥친 건 가상자산 시장 전체에 큰 충격을 줬던 5월 루나 사태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졌다. 루나에 큰돈을 투자했던 알라메다가 손실을 보자 SBF가 FTX 고객 자금으로 알라메다에 대출을 해줬다고 알려졌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상자산에 큰돈을 투자한 C 씨는 “가상자산 투자자는 거래소를 일종의 은행이나 금고로 생각한다. 내 돈을 건들진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했기 때문에 FTX가 부실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10월 FTX가 투자유치를 하면서 의문부호가 떠오르게 된다. 약 330억 달러에 달하는 기업가치였던 FTX가 10억 달러를 투자받기 위해 나서면서다. 엄청난 현금 보유량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 FTX가 굳이 금리 인상 시기에, 그것도 가상자산 시장도 좋지 않아 기업 가치 평가가 최악인 시점에 10억 달러 투자를 받기 위해 나섰다는 게 이상하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11월 2일 가상자산 전문 매체 미국 코인데스크는 ‘샘 뱅크먼 프리드의 가상자산 제국의 거인 알라메다의 대차대조표가 흐릿하다’는 보도를 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코인데스크는 알라메다 대차대조표를 확인해본 결과 자산 대부분이 ‘FTT’라는 FTX 거래소 코인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보도를 요약해보면 ‘자사 거래소가 찍어낸 코인이 자산 대부분인 투자회사는 그 자체로 비정상이다’라는 지적이었다.
11월 6일 FTX 경쟁사이자 세계 1위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 대표인 창펑자오(CZ)가 트위터를 통해 “바이낸스는 FTX 지분 일환으로 약 21억 달러에 해당하는 FTT 코인을 받았다. 최근 폭로로 바이낸스가 보유한 FTT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트윗 이후 FTT 매도세가 이어졌고, FTX에 자산을 가진 투자자는 뱅크런을 시작했다.
알라메다가 FTT 코인을 담보로 다른 코인에 투자하거나 지분을 취득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담보로 맡긴 FTT가 일정 금액 이상 하락하면 담보 비율이 떨어지면서 반대매매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메다가 FTT를 통해 구축한 제국은 연쇄 폭발로 인해 스스로 붕괴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때만 해도 알라메다만 문제될 가능성도 나왔지만 FTX가 고객의 지급 요구를 거절하면서 SBF가 세운 가상자산 제국은 비로소 붕괴됐다. 11월 9일 바이낸스가 FTX 인수를 시도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인 11월 10일 바이낸스는 FTX 인수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바이낸스가 FTX 인수를 철회한 배경으로 반독점법 문제와 함께 ‘FTX 실사 후 부실이 너무 커 도저히 인수가 불가했다’는 설이 나왔다.
11월 11일 FTX는 미국 델라웨어주의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FTX는 고객 돈 약 100억 달러(약 13조 원)를 알라메다로 대출해줬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가상자산 시장에서 FTX 파산은 루나 사태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가상자산 전문가 A 씨는 “FTX는 가만히 있어도 거래소 수수료 수입으로 엄청난 현금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 곳이 갑자기 무너졌다. 투자자는 넣어놨던 돈도 찾을 수 없게 됐다. SBF가 제멋대로 한 책임이긴 하지만 어쨌든 가상자산 시장에서 신뢰도가 가장 높아야 할 거래소가 무너진 건 이 업계에서 믿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스스로 보여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FTX 사태 이후 시장은 폭락했고 대표 가상자산 비트코인 가격도 20%가량 하락했다. 폭락한 FTT를 보유한 국내 투자자 수는 11월 9일 기준 약 6000명이며 이들이 입을 피해는 최대 23억 원가량으로 추산된다고 알려졌다.
FTX가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세계적 회계 부정 사태로 유명한 엔론을 관리 감독했던 존 레이가 FTX 새 대표로 선임됐다. 17일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존 레이는 “내 40년 경력에서 이렇게 완벽한 기업 운영 실패는 본 적이 없다”면서 “신뢰할 만한 재무 정보가 전혀 없는 곳은 처음 본다”고 밝혔다.
존 레이에 따르면 FTX는 고객 자금을 유용했고 이를 숨기기 위해 소프트웨어를 이용했다. 또한 회사 자금을 직원들 부동산과 개인 용품 구매에 썼으며, 중요한 회사 결정에 관한 기록도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드러난 바에 따르면 FTX 관련자가 알라메다로부터 거액의 개인 대출을 한 사실도 있었다. SBF가 약 5조 5000억 원, 니샤드 싱 FTX 이사는 약 6500억 원을 대출 받았다.
FTX 파산으로 또 다른 불똥도 튀었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FTX에 1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 돈을 날리게 생겼다. 또한 지난해 FTX 광고에 출연했던 미국 프로풋볼(NFL) 스타 톰 브래디와 당시 그의 부인 모델 지젤 번천은 FTX 지분을 받았는데 역시 회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홍보모델로 활동하며 보수를 FTT로 받기로 했던 미국 메이저리그(MLB) LA 에인절스 오타니 쇼헤이, 미국 프로농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테판 커리 등도 무보수로 일한 격이 됐다.
FTX 사태는 가상자산 시장이 폭락하면서 1차 폭풍이 지나가는 단계다. 하지만 앞으로 2차, 3차 폭풍이 계속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 B 씨는 “루나 사태 이후 루나에 투자했던 회사가 부실해지며 연쇄 부도가 일어났다. FTT에 투자했거나 FTX에 돈을 맡겨 둔 업체가 부도나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면서 “또한 FTX로 인해 고객 자산 보유량이 관심사가 됐다. 만약 부실을 감추고 있다가 이번 사태 여파로 발각되는 또 다른 거래소의 부도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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