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계가 경기조작 파문으로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실체적 진실이 어떻게 밝혀지든 검찰 발표가 야구계에 미친 영향은 치명적이라는 게 대다수 야구인들의 중평이다. |
#전화기 꺼놓은 B 감독
“감독과 통화가 안 돼요. 이거 원, 목소리를 들어야 기사를 쓰지.” 모 스포츠전문지 기자는 휴대전화의 통화버튼을 누르다 이내 포기했다. 이 기자는 일본 전지훈련지에 있는 A 구단 B 감독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상대방 전화기가 꺼져 있는 통에 며칠째 통화를 하지 못했다. 이 기자는 한참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나 같아도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언론 관행상 국내에 남아 있는 기자들은 국외 전지훈련지에 머무는 감독들과 수시로 전화 인터뷰를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감독들은 기자들의 전화를 받고 그날 연습 경과를 설명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A 감독은 20일 이후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다.
“이해해주십시오. 우리 감독님도 오죽하면 그러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만 하면 언론에서 감독님 발언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니 말을 줄일 수밖에요.”
일본 전지훈련지에서 만난 A 구단 홍보 직원은 소속팀 감독 입장을 두둔했다. 그럴 만도 했다. A 구단은 승부조작 의혹에 휘말린 C, D 선수의 소속팀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두 선수가 언론에 포착되고, 구단과 선수 실명이 공개된 이후 A 구단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구단 사무실로 온종일 전화가 걸려오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려는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특히나 B 감독은 2명의 소속 선수가 승부조작 의혹의 중심인물이 된 후, 언론의 표적이 됐다. 두 선수의 취재가 어렵자 기자들이 B 감독을 상대로 연일 승부조작과 관련된 질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애초 B 감독은 성실히 답변했다. 그러나 답변이 곧바로 뉴스가 되고, 승부조작 의혹이 더 확대 재생산되자 곤혹스러운 처지가 됐다. 가뜩이나 초보사령탑인 B 감독은 새 시즌 구상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결국, B 감독은 일본 현지 취재 중인 기자들에게 “승부조작 의혹과 관련한 질문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고서 구단을 통해 “당분간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B 감독은 “나도 나지만, 승부조작 의혹 사건이 터지며 선수들의 동요가 상당하다”며 “언론에 실명 공개된 두 젊은 선수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사절하는 측면도 있다”고 털어놨다.
B 감독을 지켜보는 선배 감독들도 착잡하긴 마찬가지다. SK 이만수 감독은 “설마 A 구단 선수들이 그런 몹쓸 일에 연루됐겠느냐”며 “전지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도모하기에도 바쁜 B 감독이 다른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숨 내쉬는 선수들
B 감독보다 더 난처한 이들이 있다. A 구단 선수들이다. C, D 선수의 동료인 이들은 승부조작과 관련해선 일체의 발언을 삼간다. 행여라도 두 선수를 옹호했다간 “C, D와 한통속이 아니냐”고 비난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모 고참 선수는 “선수가 승부조작에 관여됐다면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고, 동료라도 옹호할 가치가 없다”고 힘줘 말하면서도 “그러나 검찰의 정식 수사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태에서 C, D를 범죄자 취급하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수는 C, D 선수에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책임을 지면 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온 힘을 다해 훈련할 것을 조언했다”고 말했다. A 구단 선수 대부분은 동료의 무혐의를 확신하는 분위기다. C 선수와 가까운 모 선수는 “C는 우리 팀으로 이적한 지 얼마 안 되는 선수다. 이적하고서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본인이 ‘꼭 10승 이상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는 나름 성과도 냈다. 그런 선수가 승부조작에 가담할 정신이 어디 있었겠느냐”며 “D 역시 어린 선수인데, 선배들 몰래 승부조작에 참여했을 리 없다”고 단언했다.
이 선수는 “솔직히 사건이 터지고 나서 선수들이 C, D에게 ‘너를 믿는다’고 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게 사실”이라며 “하루빨리 검찰이 시시비비를 가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구단 선수들도 승부조작 파문에 들썩이긴 마찬가지다. 지방 모 구단 선수는 “‘어느 구단의 누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더라’하는 소문이 파다하다. 여기다 한술 더 떠 선수들 사이에서 ‘누가 승부조작에 참여했는데, 그 선수와 친한 모 선수도 가담했을 게 분명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양 둔갑해 퍼지고 있다”며 “내 대학 후배 이름도 거론되는 통에 ‘나까지 의심받는 게 아닌가’ 두려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야구계엔 특정선수를 지목해 그 선수의 선후배들까지 공범으로 의심하는 일종의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
선수들은 승부조작 의혹이 혹여 경기력에 영향을 줄까 크게 걱정하고 있다. 모 구단 베테랑 투수는 “이제 초구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할 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항간에 야구 승부조작이 초구 볼카운트에 의해 이뤄진다고 알려졌다. 브로커와 짠 투수가 고의로 초구 볼을 던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투수라도 초구 스트라이크만 던질 순 없다. 상황에 따라 일부러 초구 볼을 던질 때도 잦고, 유인구로 타자를 현혹할 때도 부지기수다. 가뜩이나 각 팀 A급 투수를 제외하고, 투수 대부분의 제구가 썩 좋지 않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자신 있게 던질 투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올 시즌부터 초구 볼을 던졌다간 누구라도 승부조작 사범으로 의심받게 생겼다. 만약 투수의 초구 스트라이크 부담이 높아진다면 결국 유리한 건 타자다. 무조건 초구만 노려칠 게 자명하다. 어쩌면 인위적인 타고투저 현상이 발생할지 모른다.”
A급 투수들도 부담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모 구단 에이스급 투수는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에서 판돈이 가장 크게 걸리는 항목이 ‘선발투수 강판’이라고 들었다”고 전했다.
“어느 에이스급 투수라도 갑작스러운 제구 난조로 대량실점하고서 강판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잔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물러날 때도 많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선발투수가 이기는 상황에서 대량실점을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면, 분명히 ‘승부조작’이라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억지로 투구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많은 선수는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해 승부조작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재발방지를 위해 승부조작 근절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이 선량한 선수들의 피해를 막는 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도마 위 오른 검찰 수사
“드라마로 치면 김빠진 연장 방영이다. 검찰이 수사 초기엔 적극적으로 여론몰이를 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조용하다. 승부조작 의혹을 발표할 땐 언제고, 지금은 연루 의심 선수들의 소환조차 미루고 있다. 검찰이 수사를 질질 끌다 보니 별의별 소문이 떠도는 것이다.” 모 구단 관계자는 격앙된 어조로 지지부진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야구계의 반응이 대체로 그렇다. 모 감독은 “승부조작 파문이 4월 7일 프로야구 개막 이전에 마무리돼야 시즌 전체 흥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지금 훌훌 털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 시즌을 출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3일 대구지검이 프로야구 승부조작 의혹 사건을 공론화한 이후, 검찰 수사는 답보상태다. 당장 승부조작을 밝힐 것처럼 떠들썩하게 발표했지만, 아직 브로커의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다. 승부조작 가담 의심을 받고 있는 C, D 두 선수 소환도 “조만간 (소환)할 계획”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검찰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검찰 관계자는 “프로야구 경기조작에 관여한 브로커와 선수들 사이의 돈 거래나 통화 내역 등 구체적인 단서를 확보하는 중”이라며 “정확한 수사를 위해 다소간의 시간이 소요되는 건 당연하다”고 항변했다.
이 관계자는 C, D의 소환이 늦어지고 있다는 야구계의 불만에 대해서도 “전지훈련 일정 등을 감안해 구단 측과 선수 소환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며 “검찰은 승부조작 불똥이 야구계 전체에 튈까, 되레 구단과 선수들을 적극 배려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일부에선 “지난해 프로축구 승부조작을 밝혀낸 창원지검 인사들이 대거 승진했다”며 대구지검의 수사 노력을 ‘출세욕’으로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검찰 주변에선 “대구지검이 열악한 수사 환경 속에서도 의욕적으로 움직인다”는 긍정적인 평이 더 많다. 대구지검의 승부조작 브리핑을 취재한 모 중앙일간지 기자는 “이번 사건에 배당된 검찰 수사관이 단 2명”이라며 “이 수사관들이 프로배구와 프로야구 승부조작 수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통에 수사 진행 속도가 다소 늦는 것뿐, 대구지검의 수사 노력과 열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검찰은 야구계의 바람대로 4월 7일 프로야구 개막 이전에 승부조작 수사를 매듭지을 계획이다. 수사범위도 언론에 실명이 공개된 두 선수로 한정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시간은 흐른다
A 구단은 C, D선수의 검찰 소환을 준비 중이다. 두 선수가 승부조작 가담 혐의를 적극 부인하는 상태라, A 구단은 소속선수의 무혐의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응책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의 분주한 움직임과 달리 선수단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연습경기 일정을 정상적으로 진행 중이며, 선수들도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다.
A 구단의 한 투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2004년 병역비리에 연루돼 각 구단의 주요선수들이 구속되거나 입대했다. 당시 야구계와 언론은 ‘흥행은 고사하고 프로야구가 사라질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 후 어땠는가. 2006년 2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끝나고서 관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금 야구인과 야구팬들 가운데 누가 8년 전의 병역비리 파동을 기억이나 하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문제다. 구단과 선수는 자기 일에만 충실하면 되고, 더 나은 플레이로 팬들에게 다가가면 된다. 그것이 이번 승부조작 파문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특효약이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