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속팀 후배들로부터 ‘선배’가 아닌 ‘삼촌’ 소리를 듣는다는 김병지. 그래도 열정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정말 오랜만에 만나 인터뷰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현역 선수로 뛰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체력 관리의 비결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워낙 유명한 선수들만 만나시니까 나처럼 평범한 선수를 인터뷰하러 오시기 힘들었을 것 같다(웃음). 일단 제일 쉽게 답할 수 있는 체력 관리의 비결은 술, 담배를 전혀 안 한다는 사실이다. 술은 프로 데뷔 이후부터 21년 동안 입에 대지 않았고 단 하루도 내가 프로 선수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식단, 훈련, 생활을 철저히 조절해 왔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김병지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K리그 개막전에서 대전을 상대로 3-0 승리를 거뒀다. 출발이 굉장히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올 시즌은 승강제 도입 문제 때문에 매 경기를 결승전처럼 치러야 할 것 같다. 축구전문가들이나 기자들이 8강에서 탈락할 팀으로 시·도민 구단을 유력 후보로 점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선수들이 갖는 긴장감이 대단하다. 잘못 끼워지면 탈락에 대한 멍에를 우리가 질 수 있기 때문에 경기 결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빅6에 전북 울산 포항 서울 수원 성남이 포함돼 있다. 남은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10팀이 싸우는 형국이다. 얼마나 치열한 다툼인가. 우리한테는 8강 진출이 아주 절박한 현실적인 목표인 셈이다.
―아이들 때문에 은퇴를 고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한테 훌륭한 아빠가 되는 기준은 축구 잘하는 아빠보다 같이 놀아주는 아빠다. 큰아들 태백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집에 같이 있어주면 굉장히 좋아하다가 팀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시무룩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래서 내가 태백이에게 물었다. 아빠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느냐고. 아빠가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네가 너무 힘들어 하고 아빠가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면 아빠는 은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태백이가 이렇게 말하더라. ‘아빠가 축구를 좋아하는데, 그걸 못하게 되면 아빠도 힘들지 않겠느냐’면서 ‘나 이겨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얘기를 하면서 태백이의 마음이 정리가 됐고 나 또한 태백이한테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쩌면 태백이가 허락(?)해줘서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웃음).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당연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이 2001년 칼스버그컵이다. 당시 무릎이 너무 아픈 상태에서 경기를 하는 분위기였는데 공을 잡고 던진 후 킥을 하려던 게 엇박자가 나면서 하프라인까지 드리블을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런 돌출 행동이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났고, 2002년 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표팀의 수문장은 김병지였다. 그러나 그 일 하나로 내가 아닌 이운재한테로 바통 터치가 이뤄졌다. 여론도 그렇고 심적인 고통도 심했고…, 은퇴 위기를 겪었던 시간들이었다. 가장 큰 위기를 말한다면 2008년 대표팀에 뽑힌 후 허리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수술하고 누워 있을 때였다. 겉으론 열심히 재활해서 하루 빨리 그라운드에 복귀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내 가슴 속에선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가족한테 돌아갈 시간’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져 왔었다. 그때는 진짜 은퇴할 시기라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고통스러웠던 재활을 마치고 훈련장에 나와 있게 되더라.
―대표팀 주전에서 밀려났을 때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시야에서 멀어졌다는 건 내 잘잘못을 떠나서 경쟁력에서 밀려났다는 의미였다. 그때는 내가 조금 건방졌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면 좀 더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텐데 말이다. 감독님 눈 밖에 나면서 주전 자리가 이운재에게 돌아갔다. 항상 운재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그 다음이 나였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오기로 작용했다. K리그에 복귀해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히딩크 감독의 시야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난 기죽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경기력이나 민첩성 면에선 자신 있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질문을 이어가보자. 대표팀에서 뛰고 있거나 뛰었던 골키퍼들 중 자신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나.
▲이운재의 안정감 있는 방어와 정성룡의 키와 킥 능력은 대단하다. 특히 멀리 차는 능력은 정성룡을 따라갈 자가 없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선수의 움직임을 보고 어떤 의도를 갖고 슈팅을 하려고 하는지 예측하는 부분은 내가 좀 낫지 않을까? 김영광도 민첩성과 순발력이 뛰어난 편이다. 한때 ‘제2의 김병지’라는 얘길 듣지 않았나. 비주얼적인 면에선 정성룡이, 순발력 면에선 김영광이, 안정적인 방어를 하는 부분에선 이운재가, 그리고 본능적인 감각면에선 내가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스타일과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누가 더 낫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올 시즌은 김병지 선수한테 ‘기록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현재 600경기 출전(3월 9일 현재 -31경기)과 200경기 무실점 기록이 대기 중인 상태다.
▲선수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이런 기록들이 생기는 것 같다. 흘러가는 숫자들은 결국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100경기를 채우기보다 마지막 10경기, 20경기가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 부상 방지를 위해 애쓰는 편인데, 지금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200경기 무실점 기록은 복 받은 선수한테나 가능한 기록이다. 무실점을 하면서 이기는 경기가 많았다. 이 기록들을 이어가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쓰러질 뻔한 고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앞으로도 행복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한때 대표팀에서 같이 뛰었던 이동국 선수는 K리그 최다골을 기록했다. 월드컵의 아픔을 똑같이 맛본 선수로서 이동국의 재기, 부활을 어떻게 보고 있나.
▲동국이랑 포항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면서 그에 못지 않은 아픔도 많았던 선수였다. 그래도 그걸 잘 이겨냈기 때문에 이동국이란 이름 뒤에 ‘부활’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만약 동국이가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까지 그의 가슴을 짓눌렀던 ‘월드컵의 한’은 깡그리 없어지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꼭 그런 ‘스토리’가 동국이한테 찾아들기를 바란다.
▲ 지난 4일 대전 시티즌과의 홈개막전에서 3 대 0으로 승리를 거둔 후 김병지가 김두관 도지사(왼쪽)와 손을 잡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경남 FC |
▲2008년 경기도 구리시 인근에 ‘김병지 축구클럽’을 세워 유소년 축구 선수들을 육성해 왔다. 그런데 축구장 사용이 어려워지면서 어른들과 같이 사용하는 축구장이 아닌 아이들만을 위한 전용 축구장을 만들기 위해 남양주시에 의뢰한 결과 남양주 종합운동장 부근에 유소년 전용 축구장을 세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축구장을 만들어 남양주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문제는 선수들이 편하게 지낼 숙소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남양주 인근에 350평 규모의 유소년 수련원 부지를 7억 원 정도 주고 구입했고, 올해 수련원 건물을 착공할 예정이다. 언론에서는 개인 돈을 들여 축구장과 수련원을 짓는다고 얘기하지만, 일을 빨리 빨리 처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서류도 복잡하고 받은 만큼 뭔가를 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비록 내 돈을 투자해서 만든 축구장과 숙소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현실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봉사, 사회 환원이라는 단어는 제3자가 말하기는 쉬워도 직접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김병지 선수는 남다른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의 선수 생활은 개인적인 목표와 욕심만을 위해서 뛰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 허락되는 시간까지 생기는 수입은 생활비를 떼어놓고 모두 수련원 건립이나 축구 클럽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난 생활이 어려워 정말 어렵게 축구를 했었다. 축구를 하다가 공장에 취업한 적도 있었고 상무에 입단했다가 제대 후 울산 현대에 연습생 신분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21년을 프로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생의 굴곡을 맛보며 축구를 했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선수들에게 여유가 되는 내가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축구 철학이 분명한 김병지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은퇴식을 이렇게 그리고 있었다.
“아들이 셋인데, 모두 축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 프로팀에 들어간 아들이 K리그에서 처음으로 뛰는 날, 그 자리에서 내 은퇴식을 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은퇴를 하겠지만, 은퇴식만큼은 내 아들이 뛰는 프로 무대에서 했으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일 아니겠나.”
경남 함안=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