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이 3월 22일 창립 45주년 기념일을 맞아 전직 대우 임직원들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펴낸 에세이집 <대우는 왜?>의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
대우그룹 전 임직원들의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소’는 이번 45주년 창립기념을 맞아 에세이집 <대우는 왜?>를 출간했다. ‘세계경영’을 실현한 대우그룹의 해외개척기를 과거 임직원 33인의 경험담을 통해 빼곡하게 담아냈다.
1967년 중고 책상 몇 개 들여 놓고 시작한 ‘대우실업’이 역점을 둔 전략은 바로 수출이었다. 이 전 부회장은 책을 통해 “대우실업은 ‘수출 제일주의’를 추구했다. 수출 자체가 대우의 업종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대우실업은 수완 좋은 몇몇 젊은이들의 겁 없는 도전으로 시작됐다. 출자금 500만 원으로 시작해 창업 첫 해에만 동남아 등지에 섬유제품 60만 달러를 수출하는 기적을 일구었다.
대우는 수출을 위해서 취급하지 않은 상품이 없었다. 33인 공동필자 중 한 사람인 대우재단 윤원석 이사장 역시 대우 초창기 공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훗날 종합상사의 태동을 견인한 대우실업 개발부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72년 개발부는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캠핑 굿(등산용 가방)’ 제품 수출을 의뢰받는다. 당시 국내에는 캠핑 문화가 전무했으며 그런 상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윤 이사장은 책을 통해 당시 원단을 만들기 위해 나일론과 알루미늄 공장을 뛰어다니고 재단을 위해 시장바닥을 드나들며 샘플을 만든 일화를 소개했다. 바이어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수차례 ‘NO’를 통보 받지만 끈기와 집념으로 결국 한국 최초의 캠핑 굿을 만들어 계약을 성사시킨다. 이외에도 윤 이사장은 “당시 초창기 대우는 아이들 장난감에서부터 시계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수출 대상으로 여겼다”라고 회고했다.
대우는 말 그대로 세계를 무대로 삼았다. 책에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미지의 시장을 개척하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냉전시대 제3세계권과 사회주의권 시장의 진출이다. 1973년 대우에 입사한 최계용 전 쌍용차 사장은 1976년도에 있었던 아프리카 수단 진출기를 책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했다. 당시만 해도 수단은 북한과 수교국이었으며 사실상 제3세계 국가로 분류되는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애초 대우 사업단은 수단 사람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말을 들으며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수단 정권은 디너파티에서 생뚱맞게 “나는 장사꾼이다. 나는 이곳에 장사하러 왔다”라고 당당히 소리친 김 전 회장의 당돌함에 반해 대우에 영빈관 건축공사를 맡기기에 이른다.
대우는 가장 먼저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기도 하다. 대우는 1993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인 1980년대 홍콩을 경유해 중국과의 무역을 실현했다. 당시 중국 진출기를 소개한 여성국 전 대우차 부사장은 1985년 중국 베이징에 들어가 경제발전에 목말라 있던 중국 관리들을 만났던 일화를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않았던 시장이었다. 하지만 여 전 부사장은 당시 경제발전에 대한 ‘절박함’이 가득 찼던 중국 관리들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하고 1987년 중국과 합작해 현지 법인을 만들기에 이른다.
더 놀라운 사실은 대우가 현대의 금강산 사업 진출과 개성공단이 들어서기 전인 1990년대 초, 이미 북한시장을 노크했다는 것이다. 김경연 에드미럴 호텔(대우조선해양 계열사) 대표는 90년대 초 대우의 ‘남포공단 조성사업’의 핵심인사였다. 그는 책을 통해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1991년 김 전 회장을 필두로 한 대우 사업단은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에 입성했다. 그곳에서 사업단은 상품전시회를 열었고 급기야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까지 성사시킨다. 이러한 노력으로 대우는 남포공단 조성사업에 뛰어들었고, 1996년에는 남북 역사상 최초의 합영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설립한다. 비록 그룹 해체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남북협력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남아 있다.
대우하면 생각나는 상징적인 상품과 관련된 일화도 흥미를 끈다. 국내 최초의 경차 ‘티코’는 1990년 대 자동차 시장에 ‘국민차’ 돌풍을 일으킨 희대의 히트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티코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본의 기술이전을 위해 노력한 핵심 인력들의 고군분투가 큰 몫을 했다. 당시 기술이전을 위해 일본 현지 공장에 파견된 대우 인력들은 국내와는 전혀 다른 노동강도에 어려움을 겪고 파업까지하며 울분을 삼켰다고 한다. 박용근 전 대우 부사장은 책을 통해 이렇게 국민차 티코가 출시되기 전까지 숨겨진 비화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1999년 대우는 세계를 무대로 전무후무의 신화를 창조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그룹 해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우’라는 브랜드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