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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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속사정
송종국이 은퇴를 결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어머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축구를 시작한 순간부터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선수들의 식사는 물론 원정 응원과 숙소 청소 등을 도맡아 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쳤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쓰러지셨고, 결국 송종국은 임종도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축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부모님께서 고생을 진짜 많이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선수로 성공해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꿈을 꿨었다. 어머니는 나한테 가장 든든한 힘이 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날 버티게 했던 존재의 이유였다. 그런 어머니를 갑자기 잃게 된 것이다. 축구를 하면서 정작 소중한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은퇴한 후에, 그때 가서 잘해드려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못하고 가버리신 것이다. 큰 충격이었다. 더 이상 축구를 하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은 내가 은퇴를 하는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보시겠지만, 내가 더 이상 축구선수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송종국의 은퇴 발표가 나오자, 일부 축구인들은 ‘갈 데가 없어 은퇴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송종국은 그건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적 제의는 여러 곳으로부터 받았다. 솔직히 축구만 해왔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축구 아니겠나. 그런데 의욕이 떨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아내도 은퇴에 대해 많이 아쉬워한다. 그래도 난 좋은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전 프랑스와의 친선경기 장면. 일요신문 DB |
▲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모습. 일요신문 DB |
송종국한테서 2002년 월드컵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월드컵 이전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면서 송종국은 스타플레이어의 정점을 찍었다. 한국에선 더 이상 외출 자체가 불가능했고, 잇단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사는 더욱 뜨거워지기만 했다.
“어쩌면 도망치다시피 외국으로 나갔던 것 같다. 만약 그 당시, 팬들이 보내는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누리고 그 안에 머물면서 축구를 했더라면 외국 생활하는 동안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외 진출을 해야 했고 네덜란드 페예노르트에서 또 다른 축구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송종국은 네덜란드 리그에서 만난 박지성, 이영표(PSV에인트호벤)와의 인연에 대해 이런 설명을 곁들인다.
“에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는 아약스와 더불어 빅3에 꼽혔고, 라이벌 관계였다. 아약스와 페예노르트가 FC서울과 수원삼성과 같은 사이였다면 에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는 전북현대와 FC서울과 같은 대결 구도였다. 그래서 경기가 열릴 때마다 치열한 승부 다툼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상하게 영표 형과 지성이를 경기장에서 만나면 다른 팀과 할 때처럼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되더라. 내가 마크하기 전에 빨리 다른 선수한테 공을 패스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당시 감독이 날 불러선 ‘왜 한국 선수들과 경기를 벌이면 송종국이 다른 선수가 되느냐?’라고 묻곤 하셨다. 설기현도 벨기에에서 뛰고 있던 터라 그때만 해도 영표 형, 설기현, 지성이, 핌 베어백 코치 등이 자주 모여 식사도 하곤 했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때 그 시절이 참 그리워진다(웃음).”
▲ 2008년 수원 삼성 시절. 일요신문 DB |
송종국은 네덜란드에 이어 중동팀 알 샤밥으로 이적 후에도 이영표, 설기현과 인연을 이어간다. 두 선수가 2009년 알 힐랄로 이적하면서 1년 후에 넘어온 송종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해후하게 된 것.
“영표 형이 1년 먼저 사우디에서 산 덕분에 난 정말 편하게 생활했다. 비록 팀은 서로 달랐지만 사는 곳도, 생활도 함께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우디에서도 영표 형이 속한 알 힐랄과 내가 뛰고 있는 알 샤밥은 라이벌 팀이었다. 그때도 영표 형과 그라운드에서 맞붙게 되면 피했다. 아무리 축구만 생각하려 해도 한국 선수, 그것도 영표 형을 상대로 태클을 걸거나 넘어트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송종국은 알 샤밥으로 이적하기 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수원 삼성에서 활약하며 차범근 감독 밑에서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 네덜란드에서 2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K리그로 돌아와 주장 신분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탓에 송종국은 그 일을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꼽았다.
“2008년 FC서울과 결승에서 맞붙어 우승했던 기억이 가장 짜릿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다. 팀 성적이 부진했고 FA컵 우승 외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 차범근 감독님을 떠나보내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우리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책임감도 느꼈다. 2010 시즌 중반에 사우디의 알 샤밥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고, 그때는 미련 없이 수원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송종국은 알 샤밥에서 1년을 보낸 다음 울산 현대로 복귀했다가 다시 중국 텐진 테다로 팀을 옮겼고, 계약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은퇴 준비를 한 것이다.
“중국에서 (안)정환이 형과 마지막 경기를 치른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이미 그 경기가 유니폼 입고 정환이 형과 맞붙는 마지막 경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 내내 마음이 이상했다. 2002년 월드컵 스타들이 하나 둘씩 그라운드에서 사라져가는 부분이 묘한 느낌을 준다. 결국 나까지 은퇴 수순을 밟았지만, (이)동국이, (김)남일이 형, 설기현 등이 잘해줬으면 좋겠다.”
#이적이 잦은 이유
페예노르트와 수원삼성, 그리고 알 샤밥, 울산현대, 텐진 테다까지 송종국과 축구 인생을 함께한 소속팀은 프로 첫 발을 내딛은 부산 아이파크까지 보태면 모두 여섯 팀이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이적한 횟수가 많은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돈에 의해 이 팀 저 팀 옮겨 다녔다고 말하는데, 돈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경험이었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꿈꿨던 나로선 보다 많은 리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모든 팀에서 다 좋은 대우를 받았고, 방출이나 떠밀리듯 팀을 떠난 적이 없다. 그 사실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다.”
선수 생활하며 송종국이 그린 ‘은퇴’는 미련이 있을 때, 더 할 수 있을 때, 부상 없이 건강할 때 떠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은퇴한 선배들을 보면서 난 화려한 은퇴를 하고 싶었다.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오갈 데가 없어서 초라하게 그만두는 모습이 아닌 사람들이 더 뛰어달라고 붙잡을 때, 선수로서의 가치가 있을 때 은퇴하고 싶어 했고,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전성기 때의 기량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난 건강하고 뛸 수 있는 체력이 된다. 앞으로 이 남은 에너지를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지도하며 쏟아 부을 예정이다. 용인 쪽에 유소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볼 생각이고, 현재 그 계획을 실현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riveroflym@ilyo.co.kr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축구인생을 ‘희로애락’으로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희(喜)“‘희’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2002년 월드컵이다. 그런데 또 아쉬운 부분도 있다. 당시 엉겁결에 책을 냈는데(<송종국의 아름다운 질주>)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 어린 나이에 주위 사람들 얘기만 듣고 일을 저질렀다. 책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냈어도 됐을 텐데…. 정말 책을 내는 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로(怒)“사실이 아닌 얘기가 사실처럼 기사화 됐을 때다. 축구가 항상 잘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잘하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못하고 있을 때는 항상 이런저런 소문이 나돈다. 가장 힘들었던 소문이 페예노르트 시절 굴리트 감독과의 불화설이었다. 굴리트 감독은 오노 신지와 함께 날 무척 좋아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부상 때문에 보호해야 할 선수이니 대표팀 차출에 협조할 수 없다고 강변했을 정도다. 굴리트 감독과의 불화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도 내 기사에는 굴리트 감독과의 불화로 네덜란드 생활을 마감한 것처럼 표현된다. 더 이상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哀)“네덜란드에서의 발목 부상으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처음 부상당한 후 두달 가량 재활 끝에 복귀를 했는데 복귀전에서 그만 부상 부위를 또 다시 다쳤다. 그 이후 왼발로 슈팅을 못했다. 지금까지 왼발이 제대로 펴지지도 않고 당겨지지도 않는다. 장애자나 마찬가지다. 그 전에는 양발잡이였다. 그런데 재부상 이후 패스도 부정확해졌고 밸런스가 깨지는 바람에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그 부상만 없었더라면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벤치만 달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락(樂)“수원 삼성 시절, 우승컵을 품에 안은 장면이다.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사실이다. 은퇴 후의 꿈이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다. ‘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 우여곡절의 축구인생이었다면, 앞으로는 즐거운 ‘락’만 가득한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송종국은 그라운드에서 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으로 ‘엄마’, 내 인생 최고의 라이벌로는 ‘박진섭’,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 ‘10년 전인 2002년’ 축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농사를 지었을 것’ 가장 좋았던 팀은 ‘수원 삼성’, 송종국한테 축구란? ‘인생’이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