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홉 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정선민이 지난달 30일 은퇴기자회견을 갖고 코트와 작별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알람 소리에 놀라서 황급히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데요. 얽매여 있지 않는 삶을 산 게 철 들고 나선 처음이잖아요. 시간이 갈수록 제가 은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여자로서의 삶도 누려봐야죠.”
솔직한 정선민은 은퇴를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걸림돌 중 하나가 ‘돈’이었다고 한다. 많은 선수들이 은퇴 시기를 고민하다가도 다시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연봉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것.
“저 또한 억대 연봉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엄청난 액수니까요. FA 선수 신분으로 1년 더 버티면 1억이 넘는 돈을 손에 쥘 수 있는데, 그걸 외면하기 힘들잖아요.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엄마가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딸, 그동안 벌 만큼 벌었다. 미련 두지 말고 그만둬라’하고요. 부모님 입장에선 운동 선수로 살아가면서 온갖 부상과 수술 등으로 힘겹게 보낸 시간들을 늘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래도 전 행운아예요. 돈도 명예도 누리고 가질 만큼 가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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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편히 사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지만, 일할 수 있는데 왜 빈둥대며 노느냐고 얘기하세요. 사고 위험 때문에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셨으면 좋겠는데 귀 담아 듣지 않으시더라고요. 주위의 선수들 보니까 전 부모님 복이 많은 애였어요. 부모님이 건강하시다는 것 자체가 복 받은 거잖아요(웃음).”
정선민한테는 사귄 지 1년 넘은 두 살 연상의 남자친구가 있다. 무역업을 하고 있고,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후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4월 20일, 비시즌일 때 만났어요. 당시 트레이드 문제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는데 그분을 만나는 동안 잠시 힘든 일을 내려 놓고 개인 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어요. ‘민간인’인데 의외로 선수 생활을 잘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나이 들어서 만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심, 배려, 이런 부분들이 잘 이뤄지는 것 같아요. 결혼이요? 하하, 아직 먼 일이에요. 분명 둘 다 혼기를 넘어선 나이지만 그래도 좀 더 연애를 즐기고 싶어요.”
정선민의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특히 농구 코트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여장부’나 다름없다.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고, 그래서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그를 둘러싼 근거 없는 소문이 꽤 많이 나돌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꽤 상처도 깊었고 마음 아파했고 그런 소문이 어디서 나오는지 출처를 알고 싶어 했었어요. 어느 팀보다 신한은행에 있었을 때 가장 소문이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느니, 임달식 감독님과 불화설이라느니, 훈련 중에 무단 이탈했다느니…, 참으로 기운 빠지게 하는, 전혀 사실무근인 내용들이 기사화되는 바람에 많이 다쳤습니다. 마음이….”
정선민의 얘기를 듣다가 조심스레 이렇게 질문을 해봤다. “혹시 ‘쎄’ 보이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그런 모습이 아니었으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도, 그걸 지켜낼 수도 없었을 거예요. 드세어 보이는 이미지는 오히려 저한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는 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최강팀 신한은행에서 보낸 시간들이 ‘희로애락’으로 대변되는 것 같다고 말을 이어간다.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많다 보니까 제대로 된 팀워크가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됐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기는지만 알면 팀워크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서로 양보하고, 더 끈끈한 정으로 뭉치고, 잘났다고 ‘체’하지 않고…. 그렇게 하니까 우승을 하고, 또 우승하고, 참으로 재미있게 농구를 했던 시간들이었어요.”
▲ 2007~2008시즌 신한은행 소속으로 챔피언전 MVP를 차지한 정선민. 연합뉴스 |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에 대한 여론을 바꿔놓고 싶어요. 전 그때 최선을 다해서 시즌에 임했어요. 농구에선 최고의 무대라고 하는 WNBA였잖아요. 내부에서도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 험난한 과정을 뚫고 12명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거든요. 현지에선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일이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정작 한국에선 제 활약이 미미하다고 부정적인 기사만 내보냈어요. 정말 서운하고 억울했습니다. 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거기서 보낸 시간들이 이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 농구인생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6개월입니다.”
정선민은 74년생으로 추승균, 서장훈과 동기생이다.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두 선수와 인연을 맺은 그는 처음에 추승균을 보고선 선배인 줄 알고 선수촌에서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며 웃는다.
“(추)승균이는 왠지 들어 보이는 얼굴이잖아요(웃음). 당연히 선배인 줄 알았죠. 나중에 다른 선수가 귀띔해줘서 저랑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알고 제 뒷목을 잡았습니다. 승균이한테 왜 인사를 받았느냐고 따졌더니, 간단하게 답하더라고요. ‘그냥 하니까 받았어’라고(웃음). 승균이가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고 자신감도 얻었어요. 이렇게 박수 받을 때 떠나는 게 좋은 거라는 사실을요.”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서장훈의 은퇴에 대해 이런 조언을 곁들였다. ‘나는 솔직히 장훈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조금 더 냉정해졌으면 한다. 어떤 모습으로 팬들에게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게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 동기들이 멋진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말한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기사를 보니까 장훈이가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다음 은퇴하고 싶다’고 말한 게 눈에 띄었어요. 전 장훈이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국민은행이 우승을 눈앞에서 놓치고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을 때, 1년 더 뛰어서 우승을 한 다음 화려한 은퇴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러나 과연 그 바람이 현실로 이뤄질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욕심만 채우려고 팀을 희생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아요. 난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정말 잘 뛸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나이 먹은 내 몸은 이전처럼 움직이질 않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장훈이가 욕심을 버리고 냉정해졌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인터뷰 말미에 정선민이 다시 코트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젠 선수가 아닌 지도자 정선민이 가능한 그림인지 궁금했다. 정선민은 기회가 된다면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전혀 계획이 없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후배들에게 조언해주고 가르치는 일은 쉬워요. 그러나 지도자는 다르잖아요. 선수들의 능력을 끌어내고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팀의 약점을 분석하고 한 시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거든요. 제가 만약 지금 지도자 세계에 뛰어든다면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아닌 농구선수였던 정선민이란 이름 석 자를 내세워서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지도자를 할 만한 실력을 갖췄을 때, 선수들 앞에서 절 희생시킬 수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제 자신한테 당당해졌을 때 코트로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절 기다려주는 팀이 있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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