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영자 전 롯데쇼핑 사장과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왼쪽부터). |
경기불황과 변덕스러운 날씨. 최근 패션업계가 대표적으로 꼽는 매출부진의 원인이다. 침체된 경기로 인해 소비심리가 위축돼 옷을 사는데 지갑을 열지 않는 것. 철모르는 날씨 때문에 추워서 못 팔고 더워서 팔지 못한 재고들마저 쌓여가고 있다. 여기에 해외 패스트패션(SPA)의 융단폭격은 국내 중견 패션업계에 치명타가 됐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SPA 브랜드에 반해 국내 패션업계는 가격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주일 단위로 변하는 유행을 따라잡기는 더더욱 역부족이라 자연스럽게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을 뿐 SPA 브랜드보다 더욱 눈총을 받는 존재가 있었으니 이른바 국내 패션업계의 ‘큰언니들’이다.
큰언니들은 신영자 전 롯데쇼핑 사장과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을 일컫는 말로 각 재벌가의 패션사업과 연관된 여성 경영자들이다. 물론 이들이 국내 패션업계에서 이룬 업적은 적지 않다. 외형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의 발판도 마련하는 등 우리나라 패션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큰언니들이 중견 패션업체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겉으로는 공생을 외치면서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여성의류업계 관계자는 “어떤 업종이든 중간그룹이 튼튼하지 않으면 전체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지금 국내 패션시장이 딱 그런 상황”이라며 “일부 대기업이 최상위 층에서 독식하고 있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빨려 들어가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고 있다. 지금이야 대기업이 배가 불러 모르겠지만 한바탕 외풍이 몰아닥치면 막아낼 힘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중견 패션업체 관계자도 “어느 한 쪽에서 수입을 시작하면 경쟁 브랜드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SPA도 롯데가 유니클로(UNIQLO)를 들여와 백화점과 손잡으면서 순식간에 커버렸다”며 “이어 스페인의 자라(ZARA)나 망고(MANGO) 등이 수입되며 SPA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그 직전까지도 국내 브랜드를 성장시켜 패션사업을 더욱 일으키겠다고 말해 왔지만 어떻게 대처할 시간도 없었다. 이젠 신상품도 내놓자마자 할인행사를 진행하는 처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앞서의 여성의류 관계자도 그동안 쌓인 게 많다며 하소연을 했다. 그는 “우리가 있던 자리에 대기업이 수입한 해외 유명 브랜드가 들어오더니 백화점의 위치 좋은 매장은 오너일가의 관련 브랜드가 자리 잡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며 “로드숍도 마찬가지다. 돈을 싸들고 건물주를 찾아가 자기네들한테 매장을 달라니 우리가 무슨 수로 버티나. 또 급할 땐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쳐 백화점 한 층을 통으로 내주는 등 우리는 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신 전 사장과 정 부사장은 백화점이라는 거대 유통망을 배경삼아 ‘슈퍼 갑’ 지위를 맘껏 누려 업계의 불만이 더 크다. 백화점 철수를 앞둔 패션업체 관계자는 “매년 두 차례 매장 정리가 될 때마다 경쟁 브랜드였던 곳이 떠나간다. 지나친 수수료와 공정한 기준을 지켜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며 “요즘에는 매출을 올리기 위해 행사 압력까지 넣는 곳도 있다. 이러니 국내에서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차라리 해외 진출이 낫다고들 말할 정도다. 우리야 그나마 버틸 힘이 있으니 다른 진로를 생각해보지만 그냥 주저앉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해 한 백화점 관계자는 “에스컬레이터를 둘러싼 매장은 유동인구가 많아 누구나 원하는 자리다. 때문에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를 우선적으로 배정한다”며 “물론 소비자 선호도는 매출로 파악하는 것은 맞다. 브랜드마다 자신들의 매출 수준을 알고 있어 불만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또 다른 백화점 관계자도 “절대 할인행사 참여를 강요하는 경우는 없다. 정기적 행사든 비정기적인 행사든 기획은 백화점에서 해도 참여 결정은 입점 브랜드의 몫”이라며 “브랜드 철수 논란을 비롯해 요즘 패션업계가 어려운 것은 알고 있으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변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