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동 금융위원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
지난 2004년 ‘카드대란’ 때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한 말이다.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었던 김 위원장은 이 말 한마디로 ‘관치의 대명사’가 됐다. 김 위원장이 얼마나 관치를 신봉하는지는 그가 해왔던 발언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앞서의 유명한 말을 했던 금융정책국장 시절 김 위원장은 관치에 대해 “필요한 때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시장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면 정부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며 “관치는 당국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잠시 정부 관료 자리에서 떠나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를 맡았던 2008년에는 “우리나라 정부 개입이 ‘주먹질’이라면 미국은 ‘총질’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금융시장에 대한 우리나라 관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김 위원장의 관치주의는 지난해 1월 3일 금융위원장 취임식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이날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왜곡하는 경우가 발생할 때는 단호히, 그리고 엄정히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금융위원회의 존재감만으로도 시장의 질서와 기강이 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해 금융권 인사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같은 발언이 관치 우려를 낳자 김 위원장은 오히려 “시장에 신뢰를 줘 편해지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김 위원장의 발언 강도가 최근 더욱 세졌다. 우리금융 민영화, 부실 저축은행 매각, 증시 불안 등 당면한 과제가 아무리 굵직하고 시급하다 할지라도 이따금 선을 넘는 발언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금융 매각과 관련해 지난 4월 29일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나올 수 없는 큰 딜”이라며 “마켓 종사자라면 이런 딜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금융 매각 실현 가능성이 커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이미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는 데다, 강력한 인수 후보였던 KB금융지주 어윤대 회장이 공개적으로 인수와 합병에 모두 “관심없다”고 밝혔다. 산은금융지주의 경우 특혜 논란이 우려돼 인수 후보에서 아예 제외된 상태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매각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외국계와 사모펀드에도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우리금융 매각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M&A(인수·합병)업계 관계자는 “정권 말에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 금융권의 특징”이라며 “더욱이 김 위원장 말대로 수십 년 안에 나올 수 없는 큰 딜이어서 매각 실현에 더더욱 의문”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흥행을 노린 계산된 발언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리금융 매각에 대해 김 위원장이 조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위원장 김문호) 측은 “이미 실패한 M&A 및 사모펀드 인수 방식 재탕에 불과하다”며 “우리금융의 졸속적 민영화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김석동 위원장은 솔로몬·미래 등 영업정지를 당한 저축은행 매각에 대해서도 “저축은행 인수 의향이 있는 금융지주사와 보험사가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안다”며 매각에 대해 자신감 가득 찬 모습을 보였다. “부실을 털어준다는데 인수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의 이 말은 한편으로 금융권에 가하는 압박으로 받아들여졌다. 인수 의향을 선뜻 밝히는 곳이 없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금융지주사와 보험사들을 향해 ‘알아서 인수해가라’고 압박하고 있다는 것.
금융권에서 김 위원장의 말은 곧 ‘법’으로 통한다는 것이 금융권 인사들의 얘기다. 금융위 산하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금융위 산하 예금보험공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금융 매각이나 저축은행 매각 문제는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금융위에서 정책과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장의 서슬 퍼런 ‘명령’에도 금융지주사와 보험사들이 저축은행 인수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면 역으로 김 위원장이 얼마나 밀어붙이고 있는지 짐작 가능하다. 어윤대 회장은 이미 “현재 인수한 저축은행이 적자가 나고 있다”며 “주주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 저축은행 인수에 고개를 저었다.
예상치 못한 잠재 부실이 내재돼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금융지주사들이 저축은행 인수에 도리질치는 이유다. 금융권 또 다른 관계자는 “실제로 까보면 부실 규모가 상당할지 누가 알겠느냐”며 “금융위에서 잠재 부실에 대한 보상을 무한정 해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저축은행의 부실을 털어주는 방식은 자산부채이전(P&A) 방식이다. 즉 저축은행의 부실채권은 넘기지 않고 우량자산과 부채만 넘긴다는 것. 다시 말해 부실자산은 배드뱅크(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이나 채권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관)로 보내고 클린 자산만 인수하게끔 하겠다는 복안이다. 금융위 중소금융과 관계자는 “설령 인수 후 생각보다 부실이 심각하다면 그것마저 털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줄 방침”이라며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노조 측은 “금융정책·감독 실패 책임을 은행에 떠넘기지 말라”며 “금융지주회사의 저축은행 인수 강요는 저축은행 부실의 은폐·희석일 뿐”이라고 밝혔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저축은행 문제가 터진 책임이 금융당국에 있음에도 오히려 훈계하고 지시하는 꼴”이라며 “정녕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증시 붕괴를 막기 위해 연기금을 활용하겠다’는 요지의 김 위원장의 발언도 도마에 올랐다. 일부에서 연기금을 자의적으로 쓰겠다는 ‘망발’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다.
김 위원장을 향해 비난만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앞서의 금융권 관계자는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최근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며 “우리나라 금융 현실에서 어차피 관치를 버리지 못할 바에야 요즘 시대에 밀어붙이기 식으로 비쳐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