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경기 초반엔 저조한 성적으로 마음 고생…공수주 맹활약하며 팬들에게 눈도장 찍어
지난 12일(한국시간) 피츠버그의 ‘코리안 듀오’는 최지만이 시즌 2호 홈런을 터트렸고, 배지환은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날리며 PNC파크를 찾은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두 명의 한국인 타자가 한 경기에 선발 출전해 동반 안타(홈런)을 기록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배지환은 5일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통산 첫 홈런을 때려낸 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홈런을 MLB 데뷔 첫 끝내기 홈런으로 장식했다.
배지환은 빅리그 데뷔 후 피츠버그 팬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 빠른 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수비 능력에다 젊은 선수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시선을 끌어 당긴다.
빅리그에선 ‘루키’ 신분이라 배지환은 올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매우 궁금해했다. 가장 큰 궁금증은 개막 로스터 진입 여부였다. 배지환과 스프링캠프부터 지난 8일 피츠버그 홈 개막전까지 직접 만나서 취재한 내용을 정리한다.
# 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배지환
3월 10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브레이든턴 레콤파크에서 열린 2023 메이저리그(MLB)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시범경기 전에 만난 배지환은 자신의 상황을 ‘살얼음판’에 비유했다. 2020년부터 초청 선수 신분으로 빅리그 스프링캠프에서 훈련한 적은 있지만 이번엔 개막전 로스터 진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지환은 시범경기 초반 저조한 성적으로 마음고생이 컸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온 ‘해적 선장’ 앤드류 맥커친을 소환해 비교했다.
“만약 나와 맥커친이 똑같이 15타수 무안타를 친다고 했을 때 나와 맥커친이 같은 레벨이 아니지 않나. 맥커친은 시범경기 성적이 좋지 않아도 자리가 보장된 베테랑이지만 난 여러 선수들과 생존 경쟁을 벌이는 터라 전광판에 보이는 숫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 온다.”
배지환은 출루를 해야 자신의 강점인 빠른 발을 이용해 도루를 하는데 출루 기회를 많이 갖지 못 하는 상황을 아쉬워했다. 오죽했으면 “주루 플레이에 배가 고팠다”라고 표현했을까. 그럼에도 배지환은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빅리그에선 ‘루키’이고, 팀내 입지가 없는 터라 무조건 잘해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숫자로 보이는 게 만족스럽진 않다. 오늘 안타 2개를 쳤다면 다음엔 3개를 치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할 것이다.”
# 개막 로스터 진입 여부가 궁금해
3월 15일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 해먼드 스타디움에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미네소타 트윈스 시범경기가 열렸다. 이날 배지환은 1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해 좌전 안타를 만들었는데 공격보단 수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6회말 수비에서 배지환은 자신의 빠른 발을 이용해 완벽한 수비를 펼치며 아웃 카운트를 늘렸다.
경기 후 만난 배지환은 여전히 개막 로스터 진입 관련해 궁금증을 나타냈다.
“시범경기가 중반을 넘어섰다. 아마 지금쯤이면 구단에선 개막 로스터 여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내가 팀 플랜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즌 시작부터 함께할지,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했다가 중간에 빅리그로 올라갈지 정말 궁금하다. 그래도 올해 바뀐 규정으로 인해 내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빅리그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정말 좋은 모습 보이고 싶다.”
배지환이 말한 ‘바뀐 규정’이란 투수의 견제 횟수다. 올 시즌부터 투수는 견제구를 주자당 2회까지 던질 수 있다. 허용 한도를 초과한 견제구는 주자를 태그아웃시킬 수 없다. 오히려 투수 보크로 판정해 주자가 진루한다. 견제구 제한 규정은 주자의 도루 시도 기회를 늘어나게 만들었다. 또한 베이스가 15인치 정사각형에서 18인치로 바뀐 것도 배지환한테 유리하게 작용한다. 베이스 크기의 확대로 주루 거리가 감소됐고, 이건 도루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배지환은 이런 규정 변화들이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배지환은 지난겨울 동안 개인 훈련을 통해 스윙을 교정했다. 시범경기 동안 교정된 스윙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조금씩 타구의 질이 좋아지는 걸 느끼면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확실히 타석에서 공 보는 건 시즌 때처럼 돌아왔다. 교정한 스윙을 타석에서 대입시키려다 보니 안 좋은 습관들이 나온다.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볼인 줄 알면서 방망이가 나간다. 볼넷으로 출루하면 도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그걸 놓칠 때 정말 화가 나더라. 이런 부분은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수정해나가면 된다.”
# 강렬했던 데뷔 첫 홈런과 ‘슈퍼 캐치’
마침내 배지환은 기다렸던 빅리그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3월 31일 원정 경기로 치른 신시내티 레즈의 시즌 개막전에 8번 타자 겸 2루수로 선발 출전해선 3타수 2안타 2득점 1볼넷 2도루로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8회 볼넷으로 출루해 오닐 크루즈의 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아 5-4 개막전 결승 득점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인 타자가 개막전에서 멀티히트를 기록한 건 2013년 추신수(당시 신시내티) 이후 10년 만의 일이었다.
미국 현지 매체도 배지환의 활약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미국 매체 야후스포츠는 ‘배지환의 MLB 개막전 도루 행진 주도’라는 제목으로 배지환의 활약을 집중 조명했다.
이후 피츠버그는 보스턴으로 이동해 팬웨이파크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와 원정 경기를 치렀다. 4월 5일 배지환은 보스턴전에 8번 타자 겸 2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2회초 2사 1루 상황에서 첫 타석에 들어선 배지환은 보스턴 우완 선발 닉 피베타의 바깥쪽 시속 94.8마일(152.5km/h)의 패스트볼을 받아쳐 11.3m의 그린 몬스터(팬웨이파크 왼쪽 담장)를 넘겼다. 피츠버그는 4-1로 승리했고, 배지환의 첫 홈런은 역전 결승포로 기록됐다.
이날 8회에는 보스턴 라파엘 데버스의 좌중간 안타성 타구를 그린 몬스터를 뒤로 한 채 힘껏 뛰어올라 ‘슈퍼 캐치’를 선보였다.
4월 8일 피츠버그 홈 개막전을 앞두고 경기 전 배지환을 만나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첫 타석 때 타격했을 때의 느낌은 타구가 담장을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린 몬스터가 너무 높아서 살짝 불안하기도 해 마음속으로 ‘제발 넘어가라’며 빌었다. 정말 운 좋게 공이 넘어갔고, 빅리그 데뷔 첫 홈런이 만들어졌다.”
배지환은 8회 ‘슈퍼 캐치’가 나온데 대해서도 자세를 낮춰 설명했다.
“2루수를 맡고 있다가 8회 중견수로 수비 교체가 됐는데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공을 어떻게 잡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린 몬스터가 워낙 높은 담장이라 부담을 느끼지 않으려고 원래 있던 건물의 벽이라고 생각했다. 8회 라피엘 데버스의 타구가 날아 올 때도 행운이 뒤따랐다. 담장 쪽으로 달려가 타구 위치를 보니 내 키의 3미터 위 정도에서 떨어지는 게 보이더라. 그 공이 잡힌 것이다.”
배지환은 PNC파크의 홈 개막전에 출전하는 자신이 신기하다며 이전 TV를 통해 본 강정호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강)정호 형이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휠체어를 탄 채 피츠버그의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 식전 행사(2015년)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때 PNC파크의 아름다운 전경과 관중들이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선수들을 응원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야구장에서 홈 개막전 출전을 앞두고 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다.”
배지환은 경기를 치를수록 자신을 향한 칭찬과 격려, 관심 등이 높아지는 걸 체감 중이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지금의 나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결과로 증명해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빅리그 오니까 투수들 수준이 뛰어나다는 걸 느끼고 있다. 수비도 좋아서 잘 친 타구도 곧잘 잡힌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더 빨리 뛰고 싶다. 한 경기 한 경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뛴다. 야구는 아무리 잘해도 70%가 슬픈 날이더라. 그 슬픈 날들을 잘 이겨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4월 14일 배지환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8번타자 중견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공격보다 수비에서 빛을 발했다. 4회말 2사 2, 3루 타일러 오닐의 큼지막한 타구를 점프 캐치하다 펜스에 부딪혀 쓰러졌지만 곧바로 일어섰다. 5회말 2사 1루 상황에선 알렉 버럴슨의 타구를 다이빙 캐치해 상대 공격의 흐름을 막았다. 피츠버그는 배지환의 호수비 덕분에 5-0 승리를 거뒀다.
배지환이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한 2023시즌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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