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두 배 가까운 관중 몰려…‘이승엽 키즈’ 구자욱 결승포 등 시리즈 결과는 2연패
이승엽 감독은 현역 시절 '라이언 킹'으로 불렸다. 그가 대구 더그아웃에 서 있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 자리가 원정팀 더그아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진풍경'이 된다. 이 감독이 두산 지휘봉을 잡은 순간부터 야구계는 올 시즌의 주요 흥행 포인트 중 하나로 '두산의 대구 원정경기'를 꼽았다. 또 이승엽 감독의 현 소속팀과 선수 시절 소속팀이 맞대결한다는 의미로 두산-삼성전에 '이승엽 더비'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적장'이 돼 돌아온 '라이언 킹'
그럴 만도 했다. 선수 이승엽은 삼성 구단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다. 대구의 야구 명문 경북고를 졸업한 뒤 1995년 삼성에 입단했다. 이후 KBO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 467개를 때려내면서 한국 야구 최고 타자로 우뚝 섰다. 이뿐 아니다. 국가대표 단골 4번 타자로 활약하고 한국 야구에 수많은 '8회의 기적'을 선사하면서 늘 삼성 팬을 자랑스럽게 했다. 그의 등번호 36번은 삼성 구단 영구결번으로 남았고, 삼성라이온즈파크 오른쪽 외야 담장엔 '이승엽 벽화'가 새겨졌다.
그런 이 감독이 올해부터 삼성이 아닌 두산을 지휘하고 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삼성이 아닌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원정팀' 소속으로 대구를 '방문'하는 순간도 찾아왔다. 이 감독은 삼성과 첫 3연전을 며칠 앞두고 관련 질문을 받자 "당연히 이목이 쏠리는 경기일 거다. 대구에 있는 지인들도 이미 '예매했다'고 연락을 주셨다"며 "프로야구가 관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삼성과 3연전이 조명되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웃어 보였다.
1976년생 동갑이자 올해 함께 프로 사령탑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박진만 삼성 감독과 대결도 관심거리였다. 이 감독과 박 감독은 현역 시절 각각 '국민 타자'와 '국민 유격수'로 불린 국가대표 주축 멤버였다. 이 감독에게는 여러 모로 감회가 새로울 순간이었다. 이 감독은 "지금 나는 다른 9개 구단을 똑같은 시각으로 봐야 하는 입장이지만, 아무래도 삼성과 대구에서 경기하면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면서도 "그래도 경기가 시작되면 지금 입은 유니폼에 따라 두산의 승리만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비로 하루 미뤄진 '디데이'
실제로 세간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25일 이승엽 감독이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 도착해 두산 구단 버스에서 내려서자 여러 대의 카메라가 '출근길'을 담기 위해 따라 붙었다. 기자회견실에 들어서던 박진만 삼성 감독은 취재진 규모를 보고 "마치 취임식을 하는 기분"이라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다만 하늘의 뜻에 따라 '디데이'는 25일이 아닌 26일로 하루 미뤄졌다. 대구 지역에 오전부터 내린 비 탓에 경기 감독관이 우천 취소를 결정한 것이다. 삼성 구단은 일찌감치 방수포를 덮어 그라운드를 보호했지만, 빗줄기가 좀처럼 잦아들지 않은 데다 밤 늦은 시간까지 비가 예보돼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경기 감독관은 "잔디가 너무 젖어 선수들의 부상 위험도 크다"고 설명했다.
박진만 감독은 우천 취소 직후 인터뷰에서 "야구 인기가 침체됐다는 걱정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승엽 감독과 맞대결이) 흥행 카드가 될 수 있고 관심도를 높일 수 있다면 좋은 일 같다. 확실히 많은 분이 관심을 보여주시는 분위기"라고 일단 반겼다. 그러면서도 당시 4연패 중이던 팀 성적 때문에 내심 난감한 마음도 털어놨다. 박 감독은 "두산이야 3연승으로 좋은 흐름일 때 왔지만, 우리는 연패 중이라 다른 부분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며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일단 연패를 끊고 팀 분위기를 쇄신하는 게 먼저인 것 같다"고 조심스러워했다.
#공과 사는 구분하는 이승엽 감독
스포트라이트의 한복판에 선 이승엽 감독도 첫 대구 방문 소감을 묻자 "생각보다 야구장으로 오는 길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실제 경기를 해봐야 느낌을 알 것 같다"고 담담하게 웃었다. 이 감독은 "버스 안에서 고향에 온 감격을 느끼기보다 '비가 오는데 경기는 할 수 있을까', '취소되면 선발 로테이션은 어떻게 할까', '타순은 어떻게 짤까' 하는 고민을 계속 하느라 다른 생각을 못 했다"며 "오히려 처음에 내가 '두산과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기분이 남달랐고, 지금은 이제 완전히 두산의 일원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승엽 벽화'를 봤을 때 느낌도 마찬가지다. 이 감독은 "처음엔 그 벽화를 못 봤는데, 주위에서 '한번 봐달라'고 얘기해서 일부러 보게 됐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그래도 큰 감회는 없었다.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통해 이미 여러 번 봐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삼성 팬들에게 선수 이승엽은 무척 특별한 존재다. "(대구에 와도) 특별한 감정은 없다"는 이 감독에게 자칫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삼성 팬들도 이런 마음은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이 감독은 "삼성에서 선수로 뛰면서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은 당연히 잊을 수 없다. 나라는 선수가 태어나고, 자라고, 가장 좋은 시절을 보낸 곳이라 한도 끝도 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다만 지금은 지도자로서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삼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하고, 두산 팬들 마음도 생각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또 "이런 다짐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두산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엔 이 감독이 선수 시절 아끼던 후배들이 여전히 뛰고 있다. 삼성 간판 타자 구자욱이나 에이스 원태인처럼 이 감독을 '아이돌'로 삼고 야구를 해온 후배들도 있다. 그래도 이 감독은 "아무래도 상대 팀인 데다 예전에 뛰었던 팀이라 (선수들과 만나는 게)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다. 괜히 그 친구들에게도 부담을 주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만남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선수들이 굳이 따로 인사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 멀리서 하는 눈인사로 충분하다"고 웃어 보였다.
두 팀은 비로 경기가 하루 미뤄지자 나란히 선발 투수를 교체했다. 25일에는 두산 5선발 김동주와 삼성 대체선발 이재희의 맞대결이 예정돼 있었지만, 26일 경기 선발투수는 외국인 에이스인 두산 라울 알칸타라와 삼성 데이비드 뷰캐넌으로 각각 바뀌었다. 4연승에 도전하던 두산과 4연패를 끊고 싶던 삼성이 첫 판부터 진검승부를 펼치게 된 모양새였다.
#구자욱, "이승엽 감독님 반갑지만…"
다행히 26일 날씨는 무척 맑았다. 수요일 야간경기인데도 1만 명에 육박하는 관중이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를 찾았다. 앞서 평일에 열린 홈 5경기 평균 관중 수(4879명)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이승엽 감독을 향한 삼성 팬들의 관심을 짐작케 하는 숫자다. 실제로 관중석에는 이승엽 감독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진 삼성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과거 이 감독이 입었던 유니폼을 모두 가져와 담장 앞에 걸어 놓은 팬도 보였다. 반대로 원정 응원을 온 두산 팬들은 이승엽 감독의 벽화 앞에서 두산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또 다른 의미의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이 감독의 스타성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이승엽 감독과 깊은 인연이 있는 선수들도 경기 전 남다른 감회를 털어놨다. 대표적인 선수가 삼성 외야수 구자욱(30)이다. 그 역시 이 감독처럼 대구에서 나고 자라 고향팀 삼성에 입단했고, 이 감독의 현역 마지막 세 시즌(2015~2017년)을 함께 뛰었다. 일찌감치 '이승엽의 후계자'로 기대를 받았던 구자욱은 이 감독이 은퇴한 뒤 삼성 간판스타 자리를 물려 받았다.
그래서일까. 구자욱은 이 감독과 야구장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하마터면 '선배님'이라고 부를 뻔했다"며 웃었다. 그는 "나도 다른 야구팬들과 마찬가지로 이승엽 감독님이 야구장으로 돌아오셔서 기쁘다. 감독이 되신 모습을 보니 낯설긴 했지만, 그 모습도 멋졌다"며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드렸더니, 감독님께서 '다치지 말고 잘하라'고 격려해주셨다"며 고마워했다.
구자욱이 반가워한 사람은 이승엽 감독만이 아니다. 2017년부터 3년간 삼성 지휘봉을 잡았던 김한수 두산 수석코치도 구자욱에게는 특별한 은사다. 구자욱은 "스승이신 김한수 코치님, 영웅이신 이승엽 감독님을 동시에 뵐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대구 토박이인 삼성 에이스 원태인도 '선수' 이승엽을 오랜 시간 동경해 온 '삼린이(삼성 어린이팬)' 출신이다. 그는 "삼성 팬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나도 이승엽 감독님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이 감독님을 보고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며 "감독님이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왠지 보고 싶지가 않다. 신기하고 묘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둘 다 '삼성 선수'로서 본분은 잊지 않았다. 한때 이 감독과 함께 삼성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던 구자욱도 이제 그라운드에선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때가 왔다. 구자욱은 "이 감독님이 이끄는 팀을 상대하는 건 특별한 상황이지만, 반대로 두산과 경기는 그리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지금은 박진만 삼성 감독님과 우리 팀 코칭스태프께 보답해야 한다. 팀이 연패에 빠져 있으니, 이 경기에서 박진만 감독님께 승리를 선물하고 좋은 전환점을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원태인도 "지난 등판에서 부진해 정말 아쉬웠다. 앞으로 팀을 위해 내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더 집중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승엽 감독 벽화로 날아간 결승포
구자욱의 각오는 그날 경기에서 바로 현실이 됐다. 자신의 우상이던 이승엽 감독이 맞은편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값진 결승 홈런을 터트렸다. 삼성의 1-0 승리를 만들고 4연패에 마침표를 찍는 한 방이었다. 양 팀의 유일한 득점이 '이승엽 키즈'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뷰캐넌과 알칸타라의 동반 호투 속에 0의 행진이 이어지던 4회 말. 선두 타자로 등장한 구자욱은 알칸타라의 시속 149㎞짜리 직구를 힘껏 걷어올렸다. 타구는 오른쪽 담장을 넘어 외야 관중석 뒤에 그려진 '이승엽 벽화' 앞까지 날아갔다. 구자욱은 올 시즌 삼성의 홈런 세리머니 소품인 '쇼미더삼성' 목걸이를 걸고 열화와 같은 홈팬의 박수에 화답했다.
두산에도 승부를 뒤집을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결정타가 나오지 않았다. 2회 초 무사 1·2루, 6회 초 1사 1·3루와 2사 만루 기회를 모두 살리지 못했다. 마지막 공격이던 9회 초에는 선두 타자 양의지가 좌중간으로 2루타성 타구를 날리면서 역전 기회를 잡는 듯했지만, KBO리그 최단신 선수인 삼성 중견수 김성윤의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에 걸려 아웃카운트만 하나 올라갔다. 두산은 그렇게 3연승을 마감했고, 이승엽 감독은 삼성전 시즌 첫 패를 안았다.
구자욱은 경기 후 "워낙 주목을 많이 받은 경기라 박진만 감독님께 승리를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승리를 선물해 드리고 싶다"며 "연패를 끊어서 다행이다. 이제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반면 이승엽 감독은 다음 날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있었는데,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며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감독의 책임이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는데, 벤치의 힘이 약했다"고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두 팀은 이튿날인 27일 다시 한 번 대구에서 맞붙었다. 이번엔 두산이 홈런으로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2회 초 김재환과 호세 로하스의 볼넷으로 만든 1사 1·2루에서 강승호가 좌월 선제 3점 홈런을 터트렸다. 두산은 여세를 몰아 안재석의 중전 안타와 허경민의 좌익선상 적시 2루타로 한 점을 추가했고, 2사 후 조수행의 중전 적시타까지 나와 순식간에 5-0 리드를 잡았다.
삼성도 3회 말 추격을 시작했다. 김지찬이 1사 후 유격수 실책으로 출루하자 호세 피렐라가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2점 홈런을 쳤다. 5회 말에는 피렐라의 2루타와 구자욱의 우전 적시타가 이어져 2점 차까지 따라 붙었다.
좀처럼 추가점을 뽑지 못하던 두산은 7회 초 양석환의 좌월 솔로홈런으로 마침내 한발 더 달아나면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듯했다. 그러나 삼성은 또 한 번 홈런으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7회 말 2사 1·2루에서 마운드에 오른 두산 필승조 정철원을 상대로 강민호가 스트레이트 볼넷을 골랐다. 다음 타자 오재일은 계속된 만루에서 정철원의 5구째 직구를 잡아당겨 우중간 담장을 넘겼다. 스코어를 한꺼번에 7-6으로 뒤집는 역전 결승 그랜드슬램이었다.
삼성은 9회 초 이날 키움 히어로즈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투수 김태훈을 마운드에 올려 삼자범퇴로 1점 차 승리를 지켜냈다. '이승엽 더비'로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의 두 경기는 그렇게 삼성의 2연승과 두산의 2연패로 끝났다. 두 팀의 다음 맞대결은 5월 23~25일 잠실에서 열린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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