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쑤다 밥값 하니 ‘꿀맛’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두려움이 아닌 자신감을 내세울 수 있게 됐고, 생각이 많았던 습관을 벗고 지금은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투수와 상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타석에 서는 순간 제 마음이 편해지게 된 거죠. 그렇다보니 홈런도 나오고 2루타, 3루타도 치면서 제 개인 성적은 물론 팀 성적에도 보탬이 되는, 한마디로 ‘밥값’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것 같아요. 이제야 제가 야구선수 같아 보여요.
시즌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어둡고 긴 터널을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미친 놈처럼 싸워왔더랬습니다. 처음에는 그 터널에서 빨리 벗어날 거라고 자신했고,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 모를 수렁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제 자신이 자꾸 위축되고 작아진다는 생각에 ‘야구’ 자체가 점점 어렵다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다행이 악타 감독님이 절 1번타자로 내세우시면서 장타에 대한 부담을 덜고 출루율을 높이도록 배려해주신 덕분에 가까스로 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 1회 초구에 안타를 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 부분은 지극히 계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1번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는 가급적이면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공을 던지거든요. 전 처음 보는 투수가 아니라면 그런 공을 기다리지 않는 편입니다. 무조건 치고 나가려고 달려들죠. 그게 저한테 행운으로 작용했던 것이고요.
클리블랜드가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밀려 2위로 내려앉았다가 부상 당한 선수들이 돌아오고 저 또한 안정감을 찾으면서 다시 1위에 올라섰습니다. 이전 같으면 1위에서 2위, 3위로 내려가면서 팀 전체가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은 다시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나타내고 있으니, 클리블랜드가 변화를 이룬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얼마 전 메이저리그를 취재하는 한 기자에게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에서 WBC대회 참가를 거부할 경우, 나도 선수협의 결정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선수협에서 정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WBC대회에 참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선수협의 결정에 모든 선수들이 같은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서 뛴다는 게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미국, 쿠바, 일본 등과 맞붙는 WBC대회는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국제대회라 더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저 또한 지난 광저우아시안게임을 통해 병역면제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고, 그게 WBC대회 참가로 이어진다면 기꺼이 달려가서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어야 되겠죠. 한국의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이 유보되면서 KBO 이사회와 선수협에 갈등이 생긴다면 ‘선수’인 저로선 선수협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쪼록 이런 부분들이 잘 해결돼 저로선 또 한 차례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일원이 돼 세계무대에 한국 야구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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