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연의 어머니 송정미 씨는 학창 시절 3년간 탁구선수 생활을 했다. 도구를 가지고 하얀 공을 다루는 기술은 엄마 쪽 유전자의 영향인 듯하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일요신문>이 방문한 7월 13일(금), US여자오픈 트로피가 거실 장식장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 트로피 뒷면 우승자의 이름을 새기는 곳에는 최나연 이름 석 자도 없는 상태였다. 최나연은 긴 인터뷰를 아버지 최병호(46), 어머니 송정미 씨(45)에게 넘기고 인근 골프장으로 연습을 나갔다. 얼짱 골퍼와, 젊디 젊은 그 부모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최나연의 집에서 과거여행으로 돌아갔다.# 11명 대가족이 한 집에서…
이번 US여자오픈 마지막 날 최나연은 11번홀(파5)에서 트리플보기를 범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고, 이후에도 침착한 플레이로 우승을 지켜냈다. 말이 쉽지 이러기는 쉽지 않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짧은 퍼팅 하나를 실수해 우승을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호리호리한 몸매에도 장타를 구사하고, 정확성까지 갖춘 최나연의 장점은 미모나, 컴퓨터 스윙뿐이 아니다. 지인들은 최나연의 둥글둥글한 성격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 최병호 씨도 “나연이 성격이 참 좋다. 성적이 나지 않을 때도 크게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결국 큰일을 낸다. 대인관계도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2004년 대원외고 1학년 때 KLPGA ADT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부터도 최나연은 실력과 미모 말고도 무던한 성격으로 주위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애어른 같은 차분함과 사람을 잘 사귀는 능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정답은 의외로 어머니 송정미 씨한테서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만에 결혼했어요. 제 나이 만 19세에 큰 아이를 낳고 바로 다음 해에 나연이를 낳았죠. 그리고 우리 가족을 포함해 시부모님, 시누이, 시동생, 시삼촌 등 모두 11명이 한집에서 살았어요. 정말 대가족이었죠. 1985년 결혼해 1997년 분가할 때까지 살았으니 87년생인 나연이는 어려서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익숙한 겁니다.”
어렸을 적 최나연의 가정환경은 독특했다. 대가족을 이뤄 살았고, 집 위치도 오산 버스터미널 근처 상가였기에 늘 사람이 북적거렸다. 특히 최나연의 친할머니는 사업 수완이 좋고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했다. 최나연은 지난해 친할머니에게 고급 외제 승용차를 선물할 정도로 가족을 끔찍이 생각한다. 한 살 위 얌전한 오빠(창환, 건국대 재학 중)한테는 미국으로 갈 때마다 지갑에 남은 돈을 다 주고 갈 정도로 챙긴다.
▲ 완전 귀여웠던 꼬마 최나연. 적극적인 데다 사고도 많이 친 왈가닥이었다. 오른쪽은 한 살 위의 오빠. |
성격이 적극적이었던 까닭에 꼬마 최나연은 사고도 많았다. “머리를 박박 밀었던 그 무렵이었어요. 순간접착제 뚜껑을 열다가 액체가 튀어서 눈에 들어갔지요. 눈꺼풀이 위아래가 붙어 눈을 못 떴어요. 놀란 제가 그걸 즉석에서 억지로 떼어냈는데 눈 안으로 들어간 화학물질이 문제였어요. 병원에 데려가니 눕혀놓고 눈에다 계속해서 주전자로 물을 부었어요. 다행히 이틀 만에 화학물질이 굳어서 나왔어요.” 송 씨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듯 보였다.
얼마 후에는 꼬마 최나연이 젓가락을 귀 속에 넣고 다니다가 문에 부딪혀 오른쪽 고막을 크게 다쳤다. 성장기에 이것 때문에 제법 고생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돌 고르는 기계에 오른손 검지 끄트머리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시이모님이 얼른 잘라진 부분을 주어 손수건으로 감싼 후 병원에 가 간신히 봉합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손가락은 모양이 이상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조금만 더 잘려나갔다면 골프는 시작도 못했을 거예요.” 어쨌든 최나연은 예쁘장한 외모에 비해 왈가닥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 최나연이, 45세의 ‘언니’ 같은 어머니와 포즈를 취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1985년 5월 19일에 결혼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으니 난리가 났지요. 신랑 친구들은 양복이 없어서 빌리거나 새로 맞췄고, 제 친구들은 화장도 못하던 때였어요. 모두들 ‘쟤들 분명히 오래 못 갈 거다’라고 수군거렸어요. 그런데 올해 결혼 27주년을 지냈습니다.”
송 씨는 예나 지금이나 최나연과 함께 다니면 “언니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은 까닭에 이제는 익숙하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최나연에게 불만이 생기면 “나는 지금 네 나이에 애 둘 낳고, 시집살림 하고, 가게도 하고 그랬다”고 나무란다. 실제로 최병호-송정미 씨는 커피숍, 탁구장, 주유소, 식당 등 웬만한 자영업은 다 해봤다고 한다. 다행히도 부모, 특히 엄마가 고생한 것을 최나연이 잘 알아 고맙다고 한다.
“애들 아버지는 큰애 낳고 4일 만에 군대 갔어요. 그리고 나연이가 제대 한 달 전에 태어났죠. 나연이 태어나는 거 보지도 못하고, 전화로 ‘고생했다’고만 했어요. 애가 둘이면 병역이 면제됐는데 그것도 제대로 몰랐어요. 애들을 빨리 낳았으면 남편이 군면제라도 받았겠죠. 그리고 나연이는 임신한지도 몰랐어요. 자궁 외 착상 등 제가 좀 문제가 있어서 첫 애를 어렵게 낳았거든요. 그리고도 몸이 안 좋아 둘째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임신을 알고도 애 아빠가 군에 있으니 안 낳으려고 했죠. 그런데 주위에서 나중에 다시 생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낳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낳았어요. 3㎏으로 작게 낳았는데 늘 또래 중에는 키가 큰 편이었어요.”
젊은 아빠, 엄마는 둘 다 운동신경이 좋았다. 최 씨는 골프 시작 1년 만에 싱글골퍼가 됐을 정도이고, 어머니 송정미 씨는 오산여중 1학년 때부터 오산여상 1학년까지 만 3년간 탁구선수였다. 양면라켓을 썼는데 전진속공에서 수비 스타일까지 해봤다. 도구를 가지고 하얀 공을 다루는 기술은 엄마 쪽 유전자 영향이 더 큰 셈이다.
젊은 부모이다 보니 골프계에서도 화제였다. 부모들끼리 만나면 항상 막내였다. 그리고 젊은 까닭에 부부는 최나연에게 관대했다. 2009년 미국생활 1년 반 만에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오며 ‘최나연의 홀로서기’를 단행했다. 이후 최나연은 성공적으로 미국에 정착했고, 이는 지은희, 신지애 등 다른 선수들에게 이어지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워낙에 아이들을 풀어주는 스타일인지라 최나연이 송 씨에게 “도대체 엄마는 딸이 어디서 뭐하는지 관심도 없냐?”고 따질 정도라고 한다. 최나연과 절친인 김송희는 함께 한국에 나와서 최나연과 놀 때 최나연의 어머니에게 “저희 엄마 아빠한테도 좀 얘기해주세요”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송 씨는 “저렇게 착하고 알아서 잘하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말했다.
# “외국인과 결혼해도 상관없다”최나연의 태몽도 공개됐다. 어머니 송 씨가 직접 꾼 것인데 머리 위로 포도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고 한다. 기억에 남을 장관이었는데 송 씨가 꿈 속에서 엄청나게 알이 굵은 포도를 치마 한가득 땄다. 최나연이 골프를 하기 전부터 주위에서 “그 포도가 다 돈이다”는 말들을 했다.
원래 최 씨는 아들 딸 모두에게 골프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4학년 때 오빠가 축구를 시작하는 바람에 최나연이 먼저 골프에 입문했고, 이후 아들은 골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세리키즈(1998년 박세리의 세계 제패를 본 후 골프에 입문한 세대를 말함)’에 대한 정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나연은 정확히 1997년 12월에 골프를 시작했다. 최병호 씨는 “12월 23일로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후 1998년 봄부터 초등학교 대회에 나갔는데 처음에는 박인비, 김인경 등 최나연을 포함해 모두 8명뿐이었다. 그런데 그해 6월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우승한 후 대회에 나갔는데 출전 선수가 갑자기 40명으로 늘었다. 신지애는 진짜 세리키즈지만 최나연, 박인비, 김인경은 엄밀히 말해 세리키즈가 아니다. 특히 최나연은 나이도 1988년생이 아니라 1987년생으로 세리키즈보다 1년 앞선다.
너무 일찍 ‘골프대디’와 ‘골프마미’로 성공해서 그럴까. 젊은 엄마 아빠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먼저 최나연이 골프로 번 돈에 대해서는 가능한 철저하게 최나연의 몫으로 관리한다. 새 집도 지난 4월 최나연이 한국에 왔을 때 오케이를 한 후 샀고, 명의도 최나연 앞으로 돼 있다. 전에 살던 집도 전세를 놓았는데 역시 최나연 명의다. 최나연 앞으로 협찬이 들어온 고급승용차도 마다하고, 카니발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
“아직 저희는 젊어요. 지금은 경기가 좋지 않아 사업을 접고 있는데, 젊은 만큼 다시 일을 할 겁니다. 나연이는 나연이 인생이 있고, 이제 뒷바라지도 끝난 만큼 우리 삶을 살아야죠.”
그리고 딸의 결혼 등에 대해서 생각이 좀 다르다. “화려해 보이지만 미국 투어생활은 힘들어요. 그래서 억지로 오래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2016년 하계올림픽 출전과 명예의 전당 입성이 목표인 만큼 이것이 달성되면 30대 초반이라도 은퇴할 수 있어요. 그리고 결혼도 꼭 한국인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나연이의 삶을 잘 이해한다면 외국인이라도 좋습니다.”
화성(경기도)=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앞으로 중요한 것은 영어와 체력”
최나연 부모와의 ‘호구조사’ 중간 중간에 나온 골프 얘기를 정리했다.
-최나연의 롱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영어와 체력이다. 먼저 영어는 이제 거의 극복했다고 보인다. 2011년 7만 달러를 들여 캐나다 선생님을 구해 함께 투어를 다녔다. 나연이 영어가 많이 늘었다. 그리고 골프에서는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 연 6만 달러짜리 개인 체력트레이너를 쓰고 있다.(어머니)
-이번 US오픈 우승과 2004년 첫 프로대회 우승(ADT챔피언십)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솔직히 2004년 대회가 더 의미가 있다. 그 대회를 기점으로 우리 가족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번 US여자오픈은 세계 최고의 대회지만 그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5승씩을 거두며 성장해 왔기에 감동은 덜하다.(아버지) US여자오픈 3라운드에서 6타차 선두에 오른 후 카톡으로 대화를 했다. ‘너 우승 많이 해봤잖아? 마지막 날이라고 별거 없다. 편안하게 쳐라. 너 한국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했더니 나연이가 “상금 많이 벌어서 내가 엄마 맛있는 거 사줄게”라는 답이 왔다.(어머니)
-최나연이 런던올림픽을 구경 간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연경과는 친한가?
▲맞다. 여자배구 국가대표인 김연경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낸다. 우리 집에도 왔는데 침대가 안 맞아 발이 밖으로 나왔다. 정말 키가 크다. 재활할 때 만났는데 둘이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2016년 올림픽 출전이 목표인 만큼 7월 16일(월) 출국 후 일본대회를 뛴 다음 런던으로 가 올림픽을 현장에서 구경한다고 한다. 여자배구와 축구를 보고, 소속사가 같은 수영의 박태환도 응원한다고 얘기를 들었다.(어머니)
-아직 US여자오픈 트로피에 이름이 없는데 왜 그런가?
▲이름이 없는 건 우리도 이번에 보고 처음 알았다. 주최 측에서 새겨주지 않는 모양이다. 알려진 것처럼 US여자오픈 트로피는 우승자가 1년 보관한 후 다음 대회 때 반납한다. 그리고 자신은 모조품을 만들어 보관한다. 모조품 제작도, 심지어 이름을 새기는 것도 자비로 한다. 어떻게 이름을 새겼는지, 박세리 프로나 박인비 프로 등에게 물어봐야겠다.(아버지)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