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를 타고 192개국을 여행한 윤옥환 씨는 자신은 여행가가 아니라 통일운동가라고 말한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지난 17일 <일요신문>이 윤 씨를 만나 그 이유를 들어봤다.
마실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먹으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교통사고만 5번을 당했다. 지금도 윤 씨의 팔에는 굵은 철심이 박혀 있는 데다 코뼈도 성치 않아 각종 후유증을 달고 산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도 겪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무장괴한에게 납치돼 죽음을 기다렸던 시간도 있었고 이란에서는 열병에 걸려 의식을 잃은 채 5일 동안 입원실에 누워있었다. 다행히도 인권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시 그를 일어서게 만든 건 정신력이었다.
이처럼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음에도 자신을 그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떠도는 한량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윤 씨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한반도의 암울한 분단상황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나아가 세계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나는 자전거 여행가가 아닌 통일 운동가이자 반전 운동가다. 항상 ‘One Korea, One World’라는 문구가 새겨진 윗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윤 씨의 자전거 일주에는 그만의 소신에 따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든 서민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등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했다. 그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형성한 뒤 본격적으로 통일이나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처한 분단의 아픔을 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윤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북한의 국경 허물기와 남북통일’을 위해 무려 40일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윤 씨와의 대화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체험한 북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윤 씨는 북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직접 ‘민간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의사나 외교와 관련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과 그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윤 씨는 북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언어도 통하는데 왜 국적이 달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 외국인들보다 오히려 북한 사람이 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선 절망스러웠다”는 것이 윤 씨의 얘기다.
북한 사람들과의 대화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윤 씨는 “어느 나라에서 만나든 북한 사람들의 대화 패턴은 똑같았다. 인사를 나눈 뒤 기계적으로 ‘북한과 남한의 통일이 절실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곧장 미군 철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바로 잡기 위해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북한 사람들은 언성을 높이며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이러한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자 윤 씨는 북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는 “북한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을 할까. 하지만 본인마저도 북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느냐는 생각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북한 대사관이 있는 나라라면 반겨주는 이 하나 없어도 꼭 방문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윤 씨가 경험한 북한 대사관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그는 북한 대사관은 다른 나라와 달리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기억했다. 그는 “여러 나라 대사관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방문해 봤지만 북한처럼 폐쇄적인 곳은 보지 못했다. 어느 나라든 북한 대사관에서는 검은색의 커다란 개를 키우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면 사람보다 개들이 먼저 반응하는 곳이 북한 대사관”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람을 보고도 결코 문을 여는 일이 없다고 한다. 윤 씨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새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게 전부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경계심은 한층 강화된다. 대뜸 ‘간첩이냐’고 묻는 대사관 직원들도 여럿 만났다”고 말했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온갖 수모도 겪었지만 윤 씨에게 북한 방문은 마지막 꿈이다. 윤 씨가 북한 방문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6년 6월 북한을 통해 판문점으로 귀국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북한과의 관계가 그나마 우호적일 때라 정부에서는 북한으로부터 신변안전각서만 받아오면 허가를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난관을 만났다.
문제는 돈이었다.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고. 윤 씨는 “북한에서는 거액의 후원금을 요구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비자 장사’라고 부르는데 1억~2억 원으로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자전거를 타고 반드시 북한 땅을 밟아보겠다고 말했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계속 자전거를 타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조만간 최소 4개 이상의 국가를 더 방문할 계획이다. 현재 독일인이 가지고 있는 기네스북 기록이 195개국(자전거 일주 부문)인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물론 신기록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다. 윤 씨는 “내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나를 통해 남북분단의 아픔을 널리 알리고 나아가 세계 평화를 구현할 수 있다면 어떤 장애물도 헤쳐 나갈 것이다”며 각오를 다졌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