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 연출, PPL과 거리 두기 등 호평 일색…귀신 이야기에 청춘 고민 녹여낸 시도 주목
‘악귀’는 김은희 작가가 2021년 선보인 tvN 드라마 ‘지리산’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시간을 초월한 인물들이 장기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시그널’, 백성의 굶주림과 권력자들의 탐욕을 배치해 진정한 리더의 자격을 묻는 ‘킹덤’ 시리즈로 입증된 김은희 작가만의 장르물의 세계가 ‘악귀’를 통해 더욱 확장하고 있다. 오컬트와 공포를 뒤섞고, 시대를 넘나드는 민속학을 가미한 이야기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덕분에 ‘지리산’으로 흔들렸던 위치도 다시 회복하고 있다.
#김은희의 불명예 ‘지리산’
김은희 작가는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각각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비슷하다.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방식을 유지해왔다. 이런 세계는 박신양 주연의 ‘싸인’을 시작으로 소지섭의 ‘유령’, 김혜수와 조진웅이 활약한 ‘시그널’을 넘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김은희 작가도 국내 드라마를 대표하는 스타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런 김은희 작가의 위상에 금이 간 건 ‘지리산’이다. 전지현과 주지훈이라는 특급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제작비만 300억 원대를 쏟아 부은 대작이었지만 결과는 ‘참패’. 16부작 가운데 시청률이 10%를 돌파한 건 단 한 차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방송 2회째 기록이다. 이후 줄곧 시청률이 하락해 7~8%대를 오가면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의 염원이 집약된 공간 지리산을 배경으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개연성을 찾기 어려운 이야기 전개와 작품 몰입을 방해하는 과도한 PPL 시도로 비난이 쏟아졌다. 톱스타들의 출연료가 무색할 만큼,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시대상 반영한 오컬트 장르물
‘지리산’의 실패는 뼈아픈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 와신상담의 결과일까. 2년 만에 선보인 ‘악귀’로 김은희 작가는 보란 듯이 실패를 털어내고 있다. 대중성이 다소 떨어지는 오컬트 장르라는 한계에도 방송 2회 만에 시청률 10%를 거뜬히 넘어섰다.
‘악귀’는 욕망을 먹고 자라는 악귀에 씐 주인공 구산영(김태리 분)이 악귀를 보는 민속학자 염해상(오정세 분)과 함께 악귀가 누군지 찾아가는 이야기다. 총 12부작으로 구성돼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시청자의 궁금증을 한껏 자극한다. 구산영과 염해상을 중심으로 이들 가족에 얽힌 악귀의 저주가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펼쳐진다.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그리면서 촘촘한 설계를 갖춘 덕분에 시청자의 추리력도 자극한다.
특히 김은희 작가는 “대궐 안의 이야기가 역사라면, 대궐 밖에서 벌어지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민속학”이라는 대사를 통해 무속에 기반한 민속학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우리 옆에 존재할지 모르는 귀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저주를 풀기 위해 귀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주인공들의 섬뜩한 여정을 풀어낸다. 덕분에 올해 여름 무더위를 단번에 날리는 ‘여름 최강자’ 드라마로도 등극하고 있다.
‘악귀’가 호평 받는 데는 스타 배우에게 의존하지 않은 캐스팅, 이름값보다 실력 있는 신인 연출자와 손잡은 도전, 철저하리만치 PPL과 거리를 둔 대본 집필에 있다. 모든 면에서 ‘지리산’과 반대의 길이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적재적소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배우 캐스팅에 있다. 주인공 구산영 역의 김태리는 악귀에 씐 자신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죽어가자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는 용감한 인물이다. 악귀의 속삭임을 견디면서 가족과 친구를 지키는 모습은, 김태리가 아닌 다른 배우를 떠올릴 수 없게 한다.
상대역인 오정세도 마찬가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로 비중이 있는 조연으로 활동한 오정세는 이번 ‘악귀’를 통해 대작의 주인공으로 처음 나섰다. 물론 기획 단계에서부터 주인공 후보인 것은 아니었다. 오정세가 맡은 염해상 교수 역은 몇몇 톱스타가 거론됐지만, 제작진과의 이견 끝에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연기력으로 대중을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오정세가 합류해 극에 절묘하게 녹아들고 있다.
김은희 작가 역시 “배우 오정세가 캐스팅되고부터 대본을 쓰기가 훨씬 편해졌다”며 “대본 얘기를 하는데 진지한 얼굴로 계속 탐구하는 모습이 딱 염해상 교수 같았다. 그래서 오정세 배우의 말투나 표정을 따온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악귀’에서는 오정세뿐 아니라 김원해, 박지영, 진선규 등 실력 있는 배우들이 제 몫, 그 이상을 해낸다.
김은희 작가는 그동안 스타 감독들과만 호흡을 맞춰왔다. ‘시그널’ 때는 그 이전 ‘미생’으로 스타덤에 오른 김원석 감독과 작업했고, ‘킹덤’ 시리즈의 시즌1은 영화 ‘터널’의 김성훈 감독, 시즌2는 영화 ‘특별시민’의 박인제 감독과 함께했다. ‘지리산’은 ‘미스터 션사인’과 ‘태양의 후예’를 만든 이응복 감독과 함께했다. 이번엔 다르다. ‘악귀’의 이정림 감독은 SBS 드라마 ‘VIP’로 데뷔한 신인급 감독이다. ‘악귀’가 두 번째 메인 연출작이지만, 김은희 작가가 작업한 이전 감독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으로 웰메이드 오컬트를 완성하고 있다.
‘악귀’는 아직 초반부 이야기를 펼치는 상황이다. 중후반까지 지켜봐야 드라마의 진짜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장르적인 측면을 넘어 시대상을 반영한 메시지까지 담아내면서 일찌감치 시청률을 떠나 작품 전반에 걸친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9급 공무원 준비생 설정인 주인공 김태리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청춘의 이야기다.
연출을 맡은 이정림 감독은 “김은희 작가는 진솔하게 청춘을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며 “작가 본인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고 어른으로서 청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대단하지 않고 엄청난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고 작업 과정을 돌이켰다.
작가의 의도는 인물 설정과 이야기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악귀’에서 김태리는 청춘 그 자체, 오정세는 외롭고 고립된 청춘을 보내온 인물로 그려진다. 젊은 형사 홍새 역의 홍경 역시 성공을 욕심내는 20대 청춘의 모습이다. 초자연적인 귀신 이야기를 하면서도 청춘의 고민을 녹여내려는 시도가 ‘악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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