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후보가 당내 주요세력인 민평련의 지지를 얻으면서 민주당 경선구도를 2파전으로 재편되고 있다. 왼쪽 사진은 7월 30일 제주시 SK 스마트그리드 체험센터에서 전기차 가상운전을 해보는 손 후보. 본격 경선국면에 접어들면서 문재인 후보의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8월 1일 이천 장애인체육훈련원에서 탁구 패럴림픽 선수들의 훈련을 체험하는 문 후보. 사진제공=손학규 문재인 |
불과 며칠 뒤면 발표할 예정인 선거대책본부 인선 결과의 일부를, 그것도 오후 7시가 넘어 부랴부랴 ‘중요 알림’이라는 제목까지 달아서 발표한 배경을 두고 기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했다. 보도자료 내용대로 문 후보는 평소부터 화합형 경선캠프를 구성하겠다고 밝혀왔던 터라, 그 인적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언론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날 문 후보 경선캠프가 보여준 모습은 생뚱맞아 보였다. 한 기자는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를 영입한 것도 아니고 겨우 당내 국회의원들로 채운 건데…”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내에선 이날 발표를 두고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김빼기’라는 해석이 나왔다. 민평련은 지난 7월 31일 지지후보 결정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연 결과 손학규 후보가 문 후보를 따돌리고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이튿날인 8월 1일 공개했다. 이른바 ‘교황 선출방식’으로 치러진 투표에서 손 후보가 최종 후보로 결정됐으나, 공식 지지선언을 위한 요건(참석 운영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민평련이 조직적으로 특정 대선주자를 지원하지는 않겠지만 ‘민평련의 마음’은 손 후보에게 가 있다는 시그널을 당원 및 지지층에게 알린 것이다.
그런데 문 후보가 임명한 3명의 선거대책본부장 중 노영민 의원은 민평련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문 후보 측이 민평련 간부인 노 의원을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함으로써 민평련 운영위원회 투표 결과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했다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민주당 내에 있는 여러 개의 모임 중 하나일 뿐인 민평련의 행보에 문 후보 측이 이렇게 예민하게, 그리고 발 빠르게 대응한 이유는 뭘까. 민평련이 여느 모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과 정치적 역정을 같이 했던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들의 모임인 민평련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세력, 노무현 전 대통령 세력과 함께 민주당의 3대 기둥으로 여겨져 왔다. 김 전 고문이 생전에 자신의 철학과 어긋날 때면 DJ, 노 전 대통령과 맞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민평련은 당내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모임으로 기능해 왔다. 회원 중 현역 의원도 22명으로, 친노(친노무현)그룹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회원 대부분은 현재까지 특정 대선주자 경선캠프에 결합하지 않은 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왔고, 일각에선 안철수 원장을 야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세력으로 민평련을 꼽기도 한다.
이런 민평련에서 손 후보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곧 ‘문재인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1강(문재인) 2중(손학규ㆍ김두관)’ 구도에서 문 후보와 손 후보의 ‘양강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 후보에겐 무시할 수 없는 위기 국면인 반면 손 후보에겐 극적 반전을 꾀할 절호의 기회다.
실제로 손 후보 측은 민평련 논의 결과를 홍보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민주당의 정통 세력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동안 손 후보의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져 온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 후보는 민평련 논의 결과를 접한 뒤 “민평련은 정말 까칠한데, 결국 손학규의 삶의 궤적을 그 사람들이 본 것”이라고 ‘자랑삼아’ 얘기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꼬리표’가 떨어졌다는 것은 또 친노와 비노의 대결 양상으로 치러지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손 후보가 비노의 대표주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당초 문 후보는 물론 김두관 후보에게도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던 손 후보가 도약의 발판을 잡은 반면 문 후보가 위기에 처한 데 대해 당내에선 예비경선(컷오프)의 영향이 컸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수도권의 한 3선 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이번 예비경선이 남긴 것은 세 가지”라며 “첫째가 ‘준비된 손학규의 발견’이고, 둘째가 ‘준비 안 된 문재인의 발견’이고, 셋째는 ‘김두관의 헛발질’”이라고 평가했다. 손 후보는 예상보다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반면 문 후보와 김 후보는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문 후보는 현장 연설과 토론능력 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보여줬는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타 후보들의 공세에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철저하게 ‘친노의 대리인’처럼 비쳐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민평련 소속의 한 수도권 초선의원은 “김두관 후보도 어울리지 않는 ‘친노 필패론’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참신하고 포용력 있을 것 같았던 자신의 이미지에 스스로 먹칠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인생 스토리를 갖고 있는 김 후보가 왜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지 않고 구태 정치인처럼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일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손 후보에 대해서는 “5년 전 지금처럼 했더라면…” 하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정책공약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데다 메시지와 토론·연설능력 면에서도 타 후보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부산 지역의 한 원외 인사는 “예비경선 부산 연설회 때 다른 후보들은 모두 PK(부산·경남) 개발 공약을 내걸거나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 후보를 비판하는 데 주력했지만, 손 후보는 ‘양김 분열 이후 새누리당에 몸담게 된 PK의 민주세력이 더 이상 5·16 쿠데타 옹호 세력의 들러리를 서서는 안 된다’며 ‘민주대연합론’을 얘기했다”며 “준비된 후보와 준비되지 않은 후보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손 후보가 상승세를 탄 데다 문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풍(안철수 바람)’의 피해를 크게 입는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8월 25일부터 시작되는 본 경선은 두 사람의 경쟁 양상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두 후보 모두 본 경선에서는 자신이 ‘박근혜 대항마’임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집안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자신이 ‘꿩 잡는 매’라는 사실을 지지층에게 보여줘야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의 경쟁이 단순한 말싸움을 넘어 정책과 미래 비전 대결로 치러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선 ‘준비가 덜 됐다’는 혹평을 받고 있는 문 후보가 ‘준비된 지도자’를 자처하는 손 후보와의 콘텐츠 경쟁에서 감춰졌던 힘을 발휘할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