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짜깁기한 엉터리 대동보감을 만들어 ‘문중발전기금’ 명목으로 거액을 뜯어낸 사기단이 일망타진됐다. 사기단이 제작한 성씨보감. |
최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이하 광수대)가 체포한 송 아무개 씨(52)는 일명 ‘족보 사기꾼’이다. 타깃으로 잡은 사람들에게 전화로 종친회를 사칭해 거액을 챙긴 수법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송 씨는 지난 2010년 1월부터 사기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라고 한다. 이미 송 씨보다 앞서 ‘족보’를 이용해 사기를 치는 일당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송 씨는 이러한 선배들에게 오랫동안 범죄수법을 전수받았다.
송 씨의 사기수법은 치밀하고도 지능적이었다. 그는 지난 2010년 1월,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20평 남짓한 개인 사무실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경리직원 박 아무개 씨(52)와 텔레마케터 김 아무개 씨(42) 등 총 14명을 고용해 놓고 사무실에는 ‘한국보학자료원’이라는 이름까지 버젓이 붙여 놨다.
우선 송 씨는 사기행각의 대상자를 찾기 위해 정보수집에 나섰다. 그는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대학 동문록이나 공·사기업 명부, 향우회 책자 등을 모았다. 이러한 자료들에는 개인의 신상명세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본관까지 명시돼 있기 마련이다. 송 씨는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범죄대상 하나하나를 수집했다.
사건을 담당한 광수대 신동석 팀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송 씨의 타깃은 주로 사회지도층이었다. 변호사·세무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나 지역 시의원 같은 선출직 공무원이 주요 타깃이었다. 사회 지도층이기 때문에 문중이나 종친회에서 발전기금을 요구하면 거절하기보다는 적은 금액이라도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송 씨가 고용한 텔레마케터는 “○○씨 종친회 사무장 ○○○이다. 연말 종친회 참석을 안 하셔서 안부 차 전화했다. 우리 가문이 대동보감을 3년에 걸쳐 편찬했다. 재정이 어려워 발전기금 19만 원을 책정했다. 받아보고 입금해달라”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꼬드겼다.
송 씨 일당에 당한 한 피해자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황당하고 괘씸하다. 하지만 당시는 종친회라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 나이 든 사람들이어서 더욱 의심하지 않았다”라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송 씨가 노린 성씨 대부분은 희귀 성씨였다. 신 팀장은 “피해자는 8000여 명에 이르지만 일당이 사칭한 종친회는 43개에 불과하다. 그들의 주요 타깃은 희귀 성씨였다. 본관과 분파가 적은 희귀 성씨일수록 사기행각에 걸려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치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텔레마케터들을 위한 피싱 매뉴얼(왼쪽)과 범죄 대상 수집에 사용된 인명부들. |
지금까지 경찰에 의해 확인된 피해금액은 14억 원에 달하는데 실제 피해자와 피해금액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들의 사기행각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송 씨는 텔레마케터들에게 ‘대동보감’ 한 권을 판매할 때마다 적게는 2만 5000원에서 많게는 10만 원까지 지급했다. 사무실 한쪽에는 텔레마케터들에게 피싱 수법을 교육하는 매뉴얼까지 붙어 있었다.
그의 사업은 번창할 대로 번창해 본사 사무실 이외에 텔레마케터 사무실만 두 곳이나 추가 개설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송 씨의 사기행각은 최근에서야 발각됐다. 그의 사기행각과 관련한 소문이 정통 종친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경찰은 최근 송 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을 덮쳐 송 씨를 비롯한 일당 15명을 체포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각 성씨별로 짜깁기된 대동보감이 무더기로 쌓여있었고 이를 찍어낸 대형복사기가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경찰은 송 씨 일당 이외에 비슷한 사기행각을 일삼고 있는 다른 일당들의 첩보를 입수하고 추가수사에 나설 계획이다.
신 팀장은 “종친회를 빙자해 문헌 구매를 강요하거나 발전기금을 요구할 경우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대부분 정통 종친회들이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확인해본다면 범죄피해를 쉽게 예방할 수 있다”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