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사이다’ 아니어도 세상에 꼭 필요한 인물”…이병헌과 신 찍을 때마다 주눅, 감독 “그냥 갈치라고 생각해” 조언
얼굴에서 나이가 조금씩 묻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배우 박보영(33)만큼이나 기뻐할 사람이 있을까. 해를 거듭해서 봐도 늘 소녀 같았던 그에게서 ‘제대로’ 비춰 보였던, 남편을 둔 성인 여성의 모습을 두고 쏟아진 호평에 관객들만큼이나 박보영 역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직까진 소녀의 귀여움이 남아있다”는 말에 “잉…”이라며 입을 삐죽이는 모습은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박보영이었지만.
“저도 예전엔 동안이 되게 큰 단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세월이 조금씩 묻어나는 걸 보면서 제게 있어서는 ‘시간이 약간 천천히 가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게 오히려 엄청난 장점 아닐까요? 남들보다 오랜 시간 교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더 많이, 오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걸 강점이라 생각하고 조급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부딪치면서 깨닫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2018년 ‘너의 결혼식’ 이후 5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박보영이 선택한 작품은 엄태화 감독의 재난 스릴러 ‘콘크리트 유토피아’였다. 네이버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대지진으로 폐허가 돼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스릴러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외부 생존자들과 이들로부터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입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사를 건 일상의 전쟁 속 변모하는 인간 군상의 민낯을 생생하게 표현해 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박보영은 간호사 출신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더불어 살 것을 희망하는 명화를 연기했다. 사랑하는 남편 민성(박서준 분)을 포함해 생존에 급급해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변명하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한 양심처럼 행동하는 명화의 모습은 시원한 ‘사이다’ 감성을 선호하는 요즘의 관객들에겐 다소 답답하고 허황되게 이상적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반응을 이미 알고 있다는 박보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화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저도 그런 반응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처해 있는 우리의 상황 때문에 명화를 너무 유니콘 같은, 답답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요. 사실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도덕적인 잣대가 여전히 높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에 가까운 명화의 정의를 생각한다면 과연 그걸 불편하게 보시는 분들이 많을까 싶었죠. 그런데 우리 현실이 답답하고 명화 같은 사람의 태도를 위선이라 볼 수 있는 상황이 많아지다 보니 그렇게도 보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한편으론 이 영화를 보시면서 명화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는,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런 명화를 연기하기 위해 박보영이 중점을 둔 부분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지하면서도 올곧은 명화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촬영 때때로 자꾸만 튀어나오려 하는 박보영을 감춰야 했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평소처럼 높은 목소리가 나와 연기하는 내내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고. 그러면서도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명화를 만들어내려 하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 안에도 박보영의 조각들이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명화는 이상적이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혼자만의 신념을 끝까지 가져가는 캐릭터이기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기하다가 자꾸 목소리가 높아지고 콧소리가 나오려고 해서 그걸 가다듬고 차분하게 연기하려 애썼죠(웃음). 하지만 그런 모습이 저와는 아예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제 스스로 도전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모습에서 최대한 변주한 모습이 명화였던 것 같아요. 아예 다른 모습이 아니니까, 조금의 바람이 있다면 대중들이 명화를 보고 거부감이 아니라 살짝의 낯섦을 느껴주셨으면(웃음).”
명화로서 중심을 잡고 현장에 설 때마다 박보영은 거대한 산을 마주해야 했다. 황궁아파트의 입주민 임시대표이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토리를 전면에서 이끄는 김영탁 역의 배우 이병헌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신을 찍을 때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마는 박보영을 위해 엄태화 감독이 조언한 것이 바로 “이병헌을 갈치라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고. 촬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왜 하필 갈치였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박보영은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이병헌의 카리스마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갈치였을까요?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란 말씀 같긴 한데, 갈치를 흔히 볼 수 있나? 그날 점심 반찬으로 갈치가 나와서 그러셨나(웃음). 그래도 그 말씀대로 제가 이병헌 선배님 사진을 휴대폰 배경 사진으로 해놔서 (김영탁의) 비주얼에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신을 찍을 땐 눈을 마주쳐야 하다 보니 너무 무서운 거예요(웃음)! 게다가 선배님처럼 연기를 잘하시는 분 옆에 있으려니 ‘같은 직업인데 난 왜 이래’ 하면서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난 이병헌 선배님이 아닌데 뭐!’ 하면서 극복하게 됐어요. 제가 또 이렇게 성숙해져 가고 있습니다(웃음).”
그 산을 무사히 넘어선 박보영에게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을 물으면 대번에 “관객들의 반응”이라는 답이 나왔다. 5년 만의 스크린 복귀인 데다 이제까지 도전해 본 적 없었던 재난물이라는 점, 그것도 다소 피폐하고 어두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과연 관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랬듯 개봉 뒤에 몰래 영화관을 찾아 관객들 사이에 숨어서 평을 들어볼까 했지만, 워낙 널리 퍼진 ‘박보영의 영화 관람설’이다 보니 이젠 다들 눈치챌 것 같다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저 이젠 예전처럼 그렇게 영화관 못 가요. 사람들이 다 눈치채신 것 같아요. 영화 끝나도 안 내려가고 객석에서 꼬물꼬물거리고 있으면 다 저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제가 영화 끝나면 화장실에 가서 (관객들 이야기를) 듣는 걸 많이 보셔서 그런지 이젠 ‘누가 박보영인지 눈여겨보겠다’는 분들이 많아졌더라고요. 그럼 저는 이제 어디서 이런 피드백을 받아야 하나… 그래도 한 번 가 볼래요. 이제까지 안 가던 지역으로 가야지! 다행인 게 제가 모자를 쓰면 다들 시야가 제 키보다 높다 보니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저인지 잘 모르실 것 같아요(웃음).”
날것 그대로의 반응에 목말랐다는 박보영은 오는 11월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로 데뷔 후 처음으로 OTT 작품에 도전한다. 드라마로는 영화보다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익숙했던 그가 휴먼‧메디컬 장르의 작품을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또 다른 연기 변신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06년 데뷔 후 꾸준히 새로운 얼굴에 도전해 온 박보영은 30대의 초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스스로의 손에 조금씩 자신감과 사랑을 쥐어주며 다음 스텝을 준비 중이라고 웃어 보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족의 기준이 있는데 아직은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그게 저의 고쳐야 할 고질병이기도 한데요, 자신에게 칭찬을 잘 못 해요. 제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저 자신에게 취해버리는 상황이거든요. 그 상황이 올까봐 걱정하고 멀리하다 보니 좋은 피드백을 잘 안 받고 좋지 않은 피드백만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괴롭혀 왔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씩 나를 좀 인정하고 사랑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예전엔 사람들의 말에 조금 많이 흔들렸다면 지금은 확실히 덜 흔들리고 있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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