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 YWCA 및 시민단체들이 안 씨의 여죄를 낱낱이 밝힐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
“빵꾸, 지금 새끼 낳으려고 하는 것 같아.” ‘빵꾸’는 이 씨가 애지중지 키우던 3년생 강아지의 이름이다. 평소 이 씨는 길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등 동물 사랑이 각별했다. 약 1시간 후 이 씨는 어머니가 보낸 두 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금 새끼가 태어났어. ○○아, 어디니?” 메시지를 확인하고서도 이 씨는 결국 엄마에게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평소 아끼던 강아지의 출산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이 씨는 홀린 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렇게 차 안에서 꼬박 반나절을 고민하던 이 씨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여린 손가락으로 꾹꾹 휴대폰 버튼을 눌러가며 작성한 A4 4장 분량의 글은 결국 그의 유서가 되어버렸다.
“경찰 아저씨, 이 사건을 파헤쳐주세요. 일하던 피자가게 사장에게 협박을 당했어요. 휴대폰을 확인하면 증거가 있어요, 제발 끝까지 파헤쳐주세요. 저 말고 다른 피해자들이 많을 거예요”, “친구들아. 이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줘. 죽어서라도 진실을 알리고 싶어. 지금도 (사장으로부터) 협박이 오는데 토 나온다, 더러워진 몸을 알코올로 소독하고 싶어”, “부모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아파하지 마세요….” 이 씨가 남긴 유서 중 일부분이다.
지난 10일 오후 5시 50분경 충남 서산시 수석동의 한 야산에서 여대생 이 아무개 씨(23)가 아버지의 아반떼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이 씨의 휴대폰에서 유서로 추정되는 글이 발견됐다는 점, 이 씨가 밀폐된 공간에서 연탄불을 피운 것을 보아 이 씨가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씨가 남긴 유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이 씨의 유서 중 상당 부분이 “피자 ××에게 말 못할 일을 당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건을 파헤쳐 달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산경찰서 형사3팀은 이 씨의 유서를 토대로 수사를 벌인 끝에 이 씨가 올 초 6개월간 일했던 L 피자 가게 업주 안 아무개 씨(37)로부터 8일 밤 서산시내의 한 모텔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경찰은 안 씨를 성폭력 혐의로 20일 구속한 상태다.
이 씨는 H 대 아동미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꿈 많은 대학생이었다. 평소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게 꿈’일 만큼 아이를 돌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 씨는 지난해 말 가족들에게 “공부만으로는 취업할 수 없으니까 다양한 사회경험을 쌓아야겠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세상 공부도 잘 가르쳐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한 어린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 씨의 아버지 이원구 씨(53)는 2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7월경 내가 허리디스크로 일을 못하자 딸 애가 갑자기 휴학하고 일을 하겠다고 했다. 자기 입으로는 사회경험을 쌓겠다면서 당시 만류하던 가족들을 웃으며 달랬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하다. 어린 마음에 집에 보탬이 되려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데…. 내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우리 딸이 그런 꼴을 안 당했을 거 아니냐, 내 탓이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피자집. 현재는 영업이 중단된 상태다. |
이 씨는 올 1월부터 6월까지 L 피자집에서 일했다.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해서 월 60만 원을 벌었다. 나머지 시간엔 공부를 하거나 장애우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 사이 안 씨로부터 어떤 협박을 당했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게 없다. 경찰 조사 결과 8일 성폭행 및 협박 행위가 있었다는 것만 명확하게 밝혀졌을 뿐이다.
“예쁘게 잘 키운 내 딸, 마음씨도 곱고. 얼마나 착했는데. 우리 딸. 어떡해….” 이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49)는 23일 인터뷰에서 초췌한 얼굴을 가로저으며 숨진 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 씨는 연신 눈물을 떨어뜨리다가도 “아이가 모진 꼴을 당하고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느냐. 어미로서 딸아이가 그런 고통을 겪은 줄도 몰랐다”며 가슴을 쳤다.
이어 김 씨는 “한 번은 딸아이를 보러 피자집에 갔는데 그 사장 놈이 음식을 서빙해주며 싱글싱글 웃더라. 그게 사람인가?”라고 분통을 터뜨린 후 “우리 애는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정도로 마음이 여렸지만 자존심은 무척 강했다. 치욕을 당하고 자존심에 금이 갔으니 그 여린 것이 얼마나 죽고 싶었겠느냐”며 흐느꼈다.
안 씨는 30대 중반이었던 2011년 겨울 친척으로부터 L 피자 서산점을 인수받은 새내기 사장이었다. 이미 결혼도 해 어린 딸 한 명을 두고 있었다.
이 씨가 피자집 일을 그만두고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인 8월 8일 돌연 업주 안 씨로부터 협박전화가 왔다. 안 씨는 이 씨의 집 근처로 찾아와 벽돌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리고 이 씨를 근처 모텔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안 씨는 이 씨의 상반신 나체사진을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사진 속에서 이 씨는 양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린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경찰은 “안 씨가 나체 사진을 빌미로 수시로 이 씨를 협박해왔고 이것에 부담을 느낀 이 씨가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고 전했다.
어머니 김 씨는 이번에 자식을 두 번째 잃었다. 2005년도 이 씨와 두 살 터울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지 7년 만에 꽃 같은 딸을 또다시 허무하게 떠나보냈다.
이 씨는 평소 각별하게 지내던 친오빠를 어린 나이에 잃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 한 번 안내고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했던 씩씩한 딸이었다. 김 씨는 “오빠라도 살아있으면 ○○이가 혼자 고민하다 그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하며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빠를 잃고 고등학생이 된 이 씨는 늦둥이 남동생을 엄마처럼 돌보며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이 씨가 그렇게 애지중지했다던 남동생은 “엄마, 누나 어디 있어”라는 말을 최근에야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냈다. 김 씨는 “어린 것이 2주일 동안 주변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누나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보곤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 30대 남성의 잘못된 욕망은 꿈 많던 여대생의 생을, 그리고 그 가정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렸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