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철, 와일드카드 결정전 첫 그랜드슬램…2017년에는 12~16호 터져 나와
야구의 꽃이 홈런이라면, 만루홈런은 '꽃중의 꽃'이다. 정규시즌에도 자주 보기 어렵고, 포스트시즌엔 더 힘들다. 역대 KBO리그 포스트시즌에서 만루홈런의 짜릿함을 맛본 구단도 6개 팀에 불과하다. 총 17번 중 두산(전신 OB 포함)이 6번으로 가장 많았고 NC와 KIA 타이거즈가 3번, 삼성 라이온즈와 LG 트윈스가 2번, 한화 이글스가 한 번씩 경험했다. 서호철의 그랜드슬램이 터진 순간, NC파크가 축제의 도가니로 변한 이유다. NC는 결국 이날 만루홈런 포함 6타점을 올린 서호철의 활약을 앞세워 14-9로 이겼다. 서호철은 생애 첫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데일리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는 감격을 누렸다.
#김유동의 원년 우승 확정 만루포
포스트시즌 사상 첫 만루홈런은 프로야구 원년에 나왔다. OB 김유동이 1982년 10월 12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영원히 기록에 남을 그랜드슬램 하나를 쏘아 올렸다. 김유동은 그해의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이날, OB 박철순과 명품 완투 대결을 펼치던 삼성 이선희를 제대로 울렸다. 2회 이선희의 초구를 걷어올려 솔로홈런을 쳤고, 5회 2사 1·2루에서는 3-3 동점을 만드는 중전 적시타를 때려냈다. 두 팀의 이 스코어는 8회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팽팽한 승부를 펼쳤다.
김유동의 원맨쇼는 9회 초 OB의 마지막 공격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았다. 2사 만루에서 신경식이 밀어내기 볼넷을 골라 결승점을 뽑은 뒤였다. 김유동은 계속된 만루에서 또 한 번 이선희의 초구를 통타했다. 동대문구장 담장 너머로 날아가 OB의 원년 우승에 쐐기를 박는 만루홈런이 터졌다. 김유동은 이날의 6타점을 포함해 시리즈 타율 0.400, 홈런 3개, 11타점을 기록하면서 원년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MVP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를 양도해 그간 밀린 단골 술집 외상값도 깨끗하게 청산했다는 후문이다.
그 후 통산 2호 포스트시즌 만루홈런이 나오기까지는 7년이 더 걸렸다. 1989년 10월 9일 삼성 김용국이 그해 신설된 준플레이오프(준PO) 2차전에서 그랜드슬램 갈증을 풀었다. 그는 0-2로 뒤진 6회 무사 만루에서 태평양 돌핀스 선발 최창호의 직구를 공략해 좌중간 역전 만루홈런을 쳤다. 삼성은 이 홈런 덕분에 포스트시즌 11연패를 끊어냈다.
#'홈런왕' 장종훈의 마지막 만루포
한화는 1986년 창단 이후 지금까지 딱 한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양대리그(드림리그·매직리그) 체제였던 1999년이다. 시즌 중반까지는 4강 진출이 위태로웠지만, 추석 연휴를 시작으로 막판 무서운 10연승을 질주하면서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냈다.
이 플레이오프는 한화팬들에게 레전드 장종훈의 마지막 그랜드슬램을 본 시리즈로 기억된다. 장종훈은 연습생 신화의 원조이자 불세출의 홈런왕이었다. 삼성 이승엽이 그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했다.
사실 1999년은 이미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장종훈이 서서히 선수 생활의 황혼에 접어든 시기였다. 플레이오프 상대였던 두산도 장종훈을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발 최용호가 1회 선취점을 내주고 무사 만루 위기까지 몰렸지만, 장종훈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교체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그러나 장종훈은 여전히 '장종훈'이었다. 그는 최용호의 4구째 슬라이더를 받아쳐 담장을 넘겼다. 역대 포스트시즌 통산 네 번째이자 플레이오프 두 번째 그랜드슬램이 터졌다. 장종훈 개인에게는 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10년 만에 포스트시즌에서 때려낸 홈런이었다. '나 아직 살아 있다'고 외친, 레전드의 사자후였다.
한화는 그렇게 한국시리즈에 올라가 롯데를 만났다. 그리고 장종훈은 마지막 5차전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3으로 맞선 9회 1사 3루. 장종훈은 롯데 문동환과 맞서 외야로 공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희생플라이로 결승점을 뽑았다. 장종훈은 훗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경기를 뛰어봤지만, 그렇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렸던 순간은 처음"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 투혼의 결과물은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 만든 이범호 만루포
KIA 이범호는 2019년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로 2017년 한국시리즈의 만루홈런을 꼽았다. 그해 10월 3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 KIA가 통산 11번째(전신 해태 시절 포함)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날이었다. 이범호는 정규시즌에 총 18개의 만루홈런을 때려 KBO리그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만루 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그런 그에게도 가을의 그랜드슬램은 유독 특별했다.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앞서 있던 KIA는 5차전 3회 초 1사 2루에서 로저 버나디나의 중전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았다. 뒤이어 최형우의 우전 안타와 나지완의 몸에 맞는 공으로 2사 만루 기회가 계속됐다. 타석에는 7번 타자 이범호가 들어섰다. 이범호는 4차전까지 12타수 1안타로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마운드에는 당시 KBO리그 최장수 외국인 투수였던 더스틴 니퍼트가 서 있었다. 흐름상 니퍼트 쪽이 우세해 보였다.
그러나 승부는 초구에 이범호의 승리로 끝났다. 베테랑 이범호는 니퍼트의 시속 129㎞짜리 초구 슬라이더를 벼락 같이 노려쳤다. 타구는 잠실구장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가 만루홈런으로 연결됐다. 주자 세 명에 이어 이범호까지 홈을 밟았다. 5-0 리드. 3루 쪽 KIA 관중석이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이범호의 개인 첫 포스트시즌 만루홈런이자 역대 가을야구 17호 그랜드슬램이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 "타격 밸런스가 안 좋아서 혹시 타구가 담장을 안 넘어갈까 봐 오래 바라봤다"며 "좌익수가 천천히 뛰어가길래 긴장했는데 다행히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제 됐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이범호의 홈런으로 기선을 제압한 KIA는 결국 두산의 막판 추격을 뿌리치고 7-6으로 이겼다. 4승 1패로 한국시리즈 우승. 2009년 이후 8년 만이었다. 이범호에게는 커리어 첫 우승 경험이기도 했다. 이범호는 홈런을 친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당시 KIA 사령탑이던 김기태 감독에게 헬멧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부진이 이어졌는데도 중요한 기회에서 자신을 교체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준 데 대한 감사 인사였다. 그는 "홈런을 확인한 순간 '이제 광주 가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면서 "4차전이 끝나고 가위에 눌릴 만큼 압박감이 심했는데, 귀신이 들어와서 홈런을 만들어줬나 보다. 이렇게 끝나면 불쌍하니까 하늘이 도와준 것 같다"고 거듭 감격했다.
#김동주의 첫 번째 가을 그랜드슬램
KBO리그 역사에서 포스트시즌 만루홈런을 두 개 이상 친 선수는 '두목곰'으로 불렸던 두산 김동주가 유일하다. 김동주는 2001년 10월 25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시리즈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 역전승을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당시 삼성이 2회 초 먼저 8점을 뽑아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하는 듯했지만, 두산은 3회 말 무려 12점을 쓸어 담아 일거에 분위기를 바꿨다.
엄청난 경기였다. 두산은 1회 말 타이론 우즈의 2점 홈런으로 먼저 앞서 나갔다. 그러나 2회 초 삼성의 화력이 폭발했다. 이승엽의 2루타를 포함해 안타 7개, 몸에 맞는 공 2개가 연이어 나왔다. 당황한 두산 야수들은 실책까지 보태 삼성을 도왔다. 반면 두산은 2-8로 뒤진 2회말 무사 만루에서 단 1점만 뽑았다. 승기는 일찌감치 삼성 쪽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진짜 '기회'는 3회 말에 찾아왔다. 우즈와 심재학의 연속 볼넷과 김동주의 안타로 무사 만루가 됐고, 안경현이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 1점을 만회했다. 4-8까지 쫓긴 삼성은 선발 투수 발비노 갈베스를 내리고 김진웅을 구원 투입했다. 그러나 두산 홍성흔이 기다렸다는 듯 2타점 적시타를 쳐 6-8을 만들었다. 이어 전상열의 적시타와 정수근의 역전 2타점 적시타, 장원진의 적시타가 이어져 10-8로 전세가 뒤집혔다. 심지어 삼성의 실책과 심재학의 볼넷으로 1사 만루 기회가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김동주가 사실상 승부를 끝냈다. 한 회에 두 번째로 돌아온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쳤다. 14-8. 두산 선수로는 김유동 이후 19년 만에 나온 한국시리즈 그랜드슬램이었다. 삼성의 추격 의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었다. 화력쇼에 정점을 찍은 김동주의 한 방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중계 방송사가 만루홈런 장면을 계속 리플레이하다 다음 타자 안경현의 초구 백투백 홈런을 놓쳤을 정도다. 두산의 완승이었다.
한국시리즈는 최고의 팀들이 최고의 투수들을 릴레이로 투입하는 최고 무대다. 대량 득점을 하기가 정규시즌보다 훨씬 어렵다. 그런데 두산은 이날 한 이닝에만 타자 16명이 나서 12득점을 했다. 전날 3차전에서 자신들이 세운 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득점(9점) 기록을 하루 만에 갈아 치웠다. 당시 삼성 사령탑이던 백전노장 김응용 감독은 "원래는 5점만 줘도 지는 게 한국시리즈다. 한국시리즈를 많이 해봤지만 10점을 뽑고도 진 건 처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 타자 고의4구 설욕한 두 번째 만루포
김동주의 두 번째 포스트시즌 홈런도 극적이었다. 2009년 10월 2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 두산이 3-0으로 앞선 2회 1사 2·3루였다. 경기가 완전히 넘어갈 위기에서 당시 두산 간판 타자 김현수가 들어서자 롯데 배터리는 고의4구를 택했다. 바로 뒤에 4번타자 김동주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랬다. 1차전과 2차전에서는 김동주를 연속 고의4구로 걸렀던 롯데지만, 이번엔 1·2차전에서 연속 홈런을 터트렸던 김현수가 더 무서웠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롯데가 잘못된 판단을 후회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김동주는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롯데 선발 송승준의 초구 몸쪽 직구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맞는 순간 송승준이 그대로 주저앉았을 만큼 경쾌한 파열음이 났다. 쭉쭉 뻗어 125m를 날아간 타구는 사직구장 왼쪽 펜스를 넘어 관중석 한가운데 떨어졌다. 포스트시즌 통산 아홉 번째이자 준플레이오프 통산 다섯 번째 그랜드슬램. 김동주 개인에게는 8년 만에 다시 나온 생애 두 번째 가을 만루홈런이었다. 주자 세 명이 차례로 홈을 밟았고, 김동주 역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이었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7-0. 승부는 사실상 그렇게 끝났다.
김동주는 경기 후 "시즌 중에도 몇 차례 현수를 거르고 나와 승부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며 "오히려 현수가 그냥 아웃돼 2사 2·3루가 됐다면 또 다시 나를 고의4구로 걸렀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 앞에 1사 만루라는 기회가 온 게 오히려 기뻤다"고 털어놨다. 오랜 기간 국가대표 4번 타자를 맡았던 베테랑 스타플레이어다운 자신감이었다. 김동주는 또 "롯데 선발 송승준이 시즌 때 내게 바깥쪽 공을 던지다 안타를 많이 맞았다. 그래서 이번엔 무조건 몸쪽으로 던질 거라고 생각하고 초구부터 노리고 있었다"고 했다. 김동주를 앞세운 두산은 그렇게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한 시리즈에 만루홈런이 3번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게 포스트시즌 만루홈런이다. 실제로 11호 만루포까지는 한 번도 같은 해에 나온 적이 없다. 2년 연속 가을야구에서 만루홈런이 터진 것도 2001~2002년과 2011~2012년이 전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은 무척 특별한 해였다. 역대 포스트시즌 12~16호 그랜드슬램이 모두 그해 가을에 터져 나왔다. 특히 NC와 두산이 맞붙은 플레이오프에서는 1~3차전에서 연속 만루홈런 릴레이가 펼쳐졌다. 포스트시즌 단일 시리즈에서 2개 이상의 만루홈런이 나온 건 그때가 유일하다.
1차전에서는 NC 외국인 타자 재비어 스크럭스가 주인공이었다. 스크럭스는 NC가 2-4로 뒤진 5회 초 무사 만루에서 두산 니퍼트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역전 결승 만루홈런을 때려냈다. NC의 13-5 승리. 그러나 2차전에선 당시 두산 소속이던 최주환이 데칼코마니 같은 설욕에 성공했다. 두산이 4-6으로 뒤진 6회 말 무사 만루에서 NC 외국인 제프 맨쉽을 상대로 역전 결승 그랜드슬램을 작렬했다. 이번엔 두산이 17-7로 크게 이겼다.
3차전에선 두산 민병헌이 일찌감치 만루홈런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1-0으로 앞선 2회 무사 만루에서 왼쪽 담장을 넘겨 NC 에이스였던 에릭 해커를 무너뜨렸다. 두산이 14-3으로 이겼다. 세 경기 모두 만루홈런을 친 팀이 두 자릿수 득점으로 대승했고, 만루홈런을 친 타자가 데일리 MVP로 뽑혔다. 이외에도 NC 모창민이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장 11회 만루 홈런을 때렸고, 이범호가 앞서 언급한 한국시리즈 최종전 만루포로 대미를 장식했다.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운 2017년 가을이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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