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현쪽이’ 논란 속 팬덤 트럭시위 항의…‘귀주대첩’으로 등돌린 시청자 다시 잡을까
'고려거란전쟁'의 전개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1월 13일 방영한 17회부터였다. 앞서 '고려거란전쟁'의 흥행을 이끌어냈던 양규 장군(지승현 분)이 전사한 뒤 이야기의 무대가 전장에서 왕궁으로 옮겨지며 본격적인 정치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때다. 개혁을 둘러싸고 현종과 신하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실제 역사와는 다른 설정을 가미하거나 극적 장치라고 하더라도 다소 과하게 캐릭터 변화를 연출해 "막장 전개"라는 거센 비판을 맞닥뜨렸다. 특히 현종(김동준 분)이 강감찬(최수종 분)의 목을 조르려 하거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을 타고 거칠게 달리다 결국 낙마하는 장면에 작품 팬덤조차 "황당하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갑작스런 작품의 막장화에 당황한 시청자들은 '고려거란전쟁'의 원작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을 집필한 길승수 작가의 블로그에 달려가 하소연을 쏟아냈다. 길 작가 역시 최근의 '고려거란전쟁'의 전개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특히 현종을 '현쪽이'(현종+금쪽이의 합성어, 현종의 행동이 군주가 아니라 채널A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하는 사연 아동과 같다고 시청자들이 비판하면서 나온 말)처럼 보이게 묘사한 것을 우려하며 "현종은 관용과 결단력을 같이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며 "현종의 캐릭터를 제작진에 잘 설명해줬는데 결국 대본작가가 본인 마음대로 쓰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고려거란전쟁'의 문제가 제작진에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2022년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이자 자문위원으로 계약을 맺은 길 작가는 촬영 전 몇 회의 대본을 받아본 뒤 사료와 다른 부분, 수정할 내용 등을 정리해서 전달했으나 '고려거란전쟁' 제작진들이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이정우 작가로 교체됐고, 그에게도 역사 강의를 해줬으나 30분 정도 듣고는 '필요없다'며 자문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원작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길 작가의 이야기다.
길 작가의 폭로로 졸지에 '능력없는 제작진'이 된 '고려거란전쟁' 제작진들도 가만있진 않았다. 1월 23일 '고려거란전쟁'의 연출을 맡은 전우성 감독과 각본을 맡은 이정우 작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공식입장을 밝혔다. 전 감독은 "'고려거란전쟁' 원작 계약의 경우는 리메이크나 일부분 각색하는 형태의 계약이 아니었다.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이야기의 서사보다 당시 전투 상황이 디테일이 풍성하게 담긴 작품이었다. 꼭 필요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보고자 길승수 작가와 원작 및 자문 계약을 맺었고 극 중 일부 전투 장면에 잘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길승수 작가는 이정우 작가의 대본 집필이 시작되는 시점에 자신의 소설과 '스토리텔링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증과 관련된 자문을 거절했고, 수차례 자문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고사했다"며 "이후 새로운 자문자를 선정해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집필 및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길승수 작가가 저와 제작진이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고증도 없이 제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정우 작가도 "이 드라마의 작가가 된 후 원작 소설을 검토했으나 저와는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때부터 고려사를 기반으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설계했다. 제가 대본에서 구현한 모든 신은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창작된 장면"이라며 "처음부터 별개의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 원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데도 원작 소설가가 '16회까지는 원작의 테두리에 있었으나 17회부터 그것을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의도를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은 다시 길 작가의 반박과 맞닥뜨리게 된다. 길 작가는 "자문을 거절한 적이 없다"고 서두에 밝히며 "원래 드라마 작가가 이정우 작가로 교체된 다음 작품 회의에 갔더니 이 작가가 마치 제 위의 사람인 양 제게 관직명과 인물들에 관한 내용의 페이퍼 작성을 지시했다. 그건 보조작가의 업무이지 자문이 하는 일이 아니기에 내가 통합해서 작성한 고려사가 있으니 보조작가에게 시키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전 PD가 집 근처까지 찾아와 이 작가가 시킨 대로 페이퍼를 작성할 것을 요구해 '저는 자문계약을 했지 보조작가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전 PD는 계약 내용을 수긍하면서도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고려거란전쟁'은 어려운 내용이니 자문을 계속하겠다고 했으나 다른 자문을 구했다고 하더라. 이래도 내가 자문을 거절한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꼼꼼한 고증을 거쳐 원작과는 다른 작품을 완성해 냈다는 제작진의 주장이 '고려거란전쟁'의 후반부 '역사 왜곡' 전개와 배치됨과 동시에 길 작가의 재반박으로 진실 여부도 의심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청자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앞서 1월 18일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에 "'고려거란전쟁' 드라마 전개를 원작 스토리로 가기를 청원한다'는 청원 글이 올라와 순식간에 100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내는가 하면, '고려거란전쟁'의 팬덤은 KBS 앞에서 트럭 시위까지 전개하고 나섰다.
1월 26일 오전 9시부터 진행된 이 시위의 기획자는 "최근 '고려거란전쟁'의 상식 밖의 전개와 역사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트럭 시위를 진행하게 됐다"며 "이번 트럭 시위의 목적은 비상식적인 극본 집필과 연출을 진행한 이정우 작가, 전우성 PD, 그리고 본인들 스스로가 공언한 대하사극의 가치를 훼손한 KBS를 규탄하고자 하는 것에 첫 번째 목적이 있으며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작진과 원작자 간의 분쟁은 양측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번 사태의 논점은 원작 소설을 반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멀쩡히 있는 고려사의 내용을 뛰어넘는 비상식적인 각색과 픽션"이라고 강조했다. 당대 고려사의 기록과 달리 신하인 강감찬을 찾아가 목을 조르려는 현종, 개경 시내에서 말을 타다 낙마하는 현종, '고려거란전쟁'이란 타이틀과 아무런 상관없는 가상의 궁중 암투, 터무니없는 호족비밀결사체 등 선 넘는 각색과 픽션으로 KBS가 스스로 정한 대하드라마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뿔난 시청자들의 지적이다.
다만 산으로 가는 스토리와는 별개로 배우들의 열연은 앞으로 남은 '고려거란전쟁'의 이야기에 여전한 기대를 모으게 하고 있다. 앞서 먼저 퇴장한 양규 장군 역의 지승현 배우 역시 "앞으로 현종이 좀 더 현명하게 성장해 나가게 되는 계기들이 있을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정말 탈 아시아급으로 나오게 될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다. 저도 이제 시청자의 입장에서 기대하면서 볼 생각"이라고 기대를 높인 바 있다. 실제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이처럼 압도적인 스케일로 선보일 귀주대첩의 '맛보기'로 시작됐던 만큼 앞서 흥화진 전투, 애전 전투 등 전쟁신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것처럼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면 시청자들의 마음도 되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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