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에선 제구 흔들렸으나 대전에선 볼넷 제로…김승연 회장도 5년 5개월 만에 홈구장 깜짝 방문
#3월 23일 잠실 개막전
지난해 통합우승팀 LG가 한화와 맞붙는 3월 23일 KBO리그 공식 개막전은 경기 시작 1시간 48분 전인 낮 12시 12분에 일찌감치 매진됐다. 잠실구장 만원 관중은 2만 3750명이다. 수많은 야구팬과 취재진이 이날 잠실로 몰려들면서 경기 시작 4시간 전부터 야구장 주변에 극심한 주차난과 교통체증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은 단연 류현진. 그가 한화로 복귀해 출전하는 첫 정규시즌 경기라 야구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LG 구단은 "인터넷 판매분은 예매가 시작된 직후 일찌감치 매진됐고, 시야 방해석 등 사전 고지가 필요해 남겨놓은 현장 판매분 약 500장도 티켓 박스 오픈과 함께 동났다"고 전했다.
류현진은 3루 쪽 관중석을 가득 메운 한화 팬들의 엄청난 연호 속에 마운드에 올랐다. 그가 KBO리그 마운드에 오른 건 2012년 10월 4일 대전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전 이후 4188일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류현진은 3⅔이닝 동안 6피안타 3볼넷 5실점(2자책점) 하고 마운드를 내려갔고, 한화가 끝내 2-8로 패하면서 시즌 첫 패전을 안게 됐다. 총 86개의 공을 던지면서 직구(45개), 커브(18개), 체인지업(14개), 컷패스트볼(9개) 등을 고루 활용했다. 직구 최고 구속은 평소보다 빠른 시속 150㎞까지 나왔다. 그러나 2회부터 제구가 흔들려 평소보다 볼넷이 많았고, 타선와 수비의 도움도 받지 못해 애를 먹었다.
류현진은 KBO리그 복귀 첫 이닝을 공 9개로 완벽하게 끝냈다. LG 1~3번 타자 박해민, 홍창기, 김현수를 모두 범타 처리했다. 그러나 2회 연속 안타로 0-2 리드를 빼앗겼다. 1사 후 오지환에게 볼넷을 내준 게 화근이 됐다. 2사 후 박동원에게 좌전 안타, 문성주에게 유격수 내야 안타를 맞아 만루가 됐다. 결국 LG 9번 타자 신민재에게 2타점 좌전 적시타를 얻어맞았다. 류현진은 타선이 1점을 만회한 3회를 다시 무실점으로 넘겼다. 1사 후 김현수와 9구 승부 끝에 두 번째 볼넷을 허용했을 뿐, 오스틴 딘을 1루수 파울플라이로 잡고 위기를 벗어났다.
문제는 2-2 동점이 된 4회였다. 류현진은 문보경과 박동원을 연속 1루수 땅볼로 솎아내고 손쉽게 투아웃을 잡았다. 다음 타자 문성주를 볼넷으로 내보냈지만, 신민재를 2루수 땅볼로 유도하고 가볍게 이닝을 끝내는 듯했다. 그런데 이때 2루수 문현빈이 타구를 뒤로 빠트리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순식간에 2사 1·3루 위기가 찾아왔다. 호투하고도 수비 도움을 받지 못해 애를 먹었던, '과거의 류현진'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크게 흔들린 류현진은 박해민-홍창기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3점을 더 잃었다. 4회의 3실점이 모두 비자책점이었다. 류현진이 다음 타자 김현수에게도 좌전 안타를 맞자 한화 벤치는 결국 투수를 이태양으로 교체했다. KBO리그 시절 늘 개막전 성적이 좋지 않아 애를 먹었던 류현진이 올해도 그 징크스를 떨치지 못한 모양새다. 한화 마운드는 결국 선발 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한 LG의 '창'을 막지 못하고 3점을 더 내준 뒤 패배를 확정했다.
류현진은 경기 후 "팬분들께 승리를 선물하지 못해 아쉽다. 다음 경기에선 꼭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는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많은 팬들이 내 이름과 나를 응원하는 함성을 외쳐주셔서 정말 기뻤고, 감회가 새로웠다"며 "그동안 준비를 잘 해왔고 날씨도 좋았기 때문에 구속이나 컨디션은 괜찮았다. 다만 제구가 좋지 않았고,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류현진은 복귀전에서 고전한 원인을 야수 실책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는 "한 시즌의 첫 게임이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긴장했었던 것 같다"며 "직구가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마지막에 가운데로 몰리면서 맞아나갔다. 변화구 제구도 아쉬웠다.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역시 투수는 제구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낀 경기였다"고 했다. 이날 직구 최고 구속이 평소보다 빨랐지만, 류현진은 거듭 "구속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시속 150㎞를 던져도 (제구가 안 되면) 한국 타자들의 콘택트 능력이 좋아서 소용 없다. 반면 시속 140㎞대 초반이 나와도 제구 코너워크가 된다면, 좀 더 좋은 성적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첫 경기에서는 예방 주사를 한 번 맞았다고 생각하고 다음 경기를 잘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아쉬움보다 후배의 마음을 먼저 살피기도 했다. 류현진은 4회가 종료되고 야수들이 더그아웃에 돌아오자마자 앞서 실책을 한 문현빈을 불러세웠다. 프로에서 날개를 펴야 할 젊은 후배가 행여 미안한 마음에 주눅이라도 들까 염려해서다. 류현진은 24일 "현빈이에게 '내가 (후속 타자들을) 못 막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실책 후에 대량실점을 해서 기가 죽어 있을까봐 '고개 들고 하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자책하고 있었을 문현빈에게는 큰 위안이 될 한마디다. '고개를 든' 문현빈은 실제로 다음 날인 3월 24일 LG전에서 결승타의 주인공이 됐다. 1-1로 맞선 5회 무사 2루에서 중전 적시타를 쳐 팽팽하던 승부의 균형을 깼다. 한화가 그 후 한 번도 리드를 놓치지 않으면서 시즌 첫 승리를 거뒀다. 문현빈은 "류현진 선배님께서 계속 내게 미안해하셔서 내가 더 죄송했다. 실책 후에 멘탈을 다잡아보려 했는데, 점수로 이어지는 실책이었던 데다 그 후 팀 분위기가 확 기울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많이 분했다"며 "류현진 선배님을 비롯한 팀 동료분들이 계속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그 덕에 회복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3월 29일 대전 개막전
그 후 6일이 지난 3월 29일, 이번엔 잠실이 아닌 대전 일대가 야구 열기로 들썩였다. 한화가 올 시즌 홈에서 치르는 KT와의 주말 3연전 첫 경기 입장권 1만 2000장이 경기 시작 2시간 전인 오후 4시 36분에 다 팔려나갔다. 앞서 열린 원정 5연전에서 4연승을 하고 금의환향해 팀 분위기가 최고조인 데다, 류현진이 4194일 만에 대전에서 정규시즌 경기에 등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류현진의 대전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 특별한 손님도 찾아왔다. 한화 구단주인 김승연(72) 한화그룹 회장이 5년 5개월 만에 대전구장을 깜짝 방문했다.
김 회장이 한화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건 2018년 10월 19일 준플레이오프(준PO) 1차전 이후 처음이다. 당시 김 회장은 11년 만에 찾아온 한화의 가을야구를 기념하기 위해 총 1만 3000명이었던 만원 관중에게 장미꽃을 한 송이씩 선물했다. '11년 동안 부진했던 성적에도 승패를 넘어 불꽃응원을 보내준 이글스 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한화는 그 후 5년간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야구장 관중석에 앉은 구단주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라진 한화(Different Us)'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예년보다 탄탄해진 전력으로 힘찬 스타트를 끊었다. 절대 에이스 류현진의 복귀는 그 목표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조각이었다. 김 회장은 돌아온 에이스에게 8년 총액 170억 원을 안기면서 한화 팬들의 염원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모처럼 공개적으로 야구장에 나타나 선수단을 격려하고 팬들에게 구단주의 의지를 보여줬다.
류현진도 구단주와 야구장을 가득 메운 홈팬들 앞에서 명불허전 제구력을 다시 뽐냈다. 6이닝 8피안타 2실점으로 시즌 첫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하는 동안 삼진은 무려 9개를 잡았고, 볼넷과 몸에 맞는 공은 하나도 없었다. 최고 구속은 시속 147㎞까지 나왔고, 직구 평균 구속은 시속 144㎞였다. 공 89개 중 스트라이크는 66개(74.2%). 직구(43개)와 체인지업(19개), 컷패스트볼(커터·17개), 커브(10개)를 고루 섞어 던지며 KT 타선을 요리했다. 다만 강판 직전 동점을 허용한 뒤 2-2로 맞선 7회 초 마운드를 내려가 복귀 첫 승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한화는 9회 말 요나단 페라자의 2루타와 노시환의 고의 볼넷으로 만든 1·2루에서 임종찬의 끝내기 안타가 터져 3-2로 승리했다. 개막전 1패 후 5연승 행진. 끝내기 승리가 확정되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주변의 축하 인사를 받는 김 회장의 모습이 중계 화면에 포착되기도 했다.
류현진은 경기 후 "내가 승리 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팀이 이겨서 괜찮다. 5연승을 이어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며 활짝 웃었다. 또 "직구 최고 구속은 첫 등판(시속 150㎞)보다 덜 나왔지만, 그날보다 제구는 훨씬 좋았다"며 "체인지업, 커터 등 전체적으로 제구가 잘 됐고 실투 외에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잘 던진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자평했다.
5회까지 물 흐르듯 완벽하게 흘러간 경기였다. 류현진은 1회 선두 타자 배정대에게 중전 안타를 맞아 무사 1루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KT 2번 타자 천성호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우고 첫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이어 멜 로하스 주니어에게 좌전 안타를 맞아 다시 1사 1·2루 위기에 몰리자 KT 4번 타자 박병호를 유격수 병살타로 유도하면서 이닝을 끝냈다. 2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첫 타자 강백호를 4구 만에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황재균과 장성우도 범타로 처리했다. 3회엔 선두 타자 김민혁에게 좌전 안타를 맞았지만, 김상수-배정대-천성호를 상대로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4회는 이날 투구의 백미였다. 류현진은 로하스에게 몸쪽 깊은 커터를 던져 1루수 파울플라이를 유도한 뒤 박병호에게 바깥쪽 높은 직구를 던져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다음 타자 강백호에게는 초구 슬로 커브(시속 99㎞), 2구 높은 직구(시속 143㎞), 3구 바깥쪽 커브(시속 115㎞)를 연이어 꽂아 넣는 완벽한 완급조절로 3구 삼진을 잡아냈다. 류현진은 이어진 5회도 무실점으로 마쳤다. 1사 후 장성우에게 우전 안타를 맞았지만, 김민혁을 1루수 땅볼, 김상수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우고 가볍게 마침표를 찍었다. 바깥쪽과 몸쪽, 위와 아래를 모두 넘나드는 류현진의 제구력에 KT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유일한 아쉬움은 2-0 리드가 이어지던 6회였다. 류현진은 1사 후 천성호와 로하스에게 연속 안타를 맞아 1사 1·2루에 몰렸다. 여기서 박병호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고 한숨 돌리는 듯했지만, 끝내 강백호에게 적시타를 맞아 첫 실점을 했다. 다음 타자 황재균의 타구는 빗맞았지만,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 중견수 앞에 뚝 떨어지는 동점 적시타가 됐다. 류현진은 계속된 2사 1·2루에서 장성우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워 추가 실점을 막아낸 뒤 7회 교체됐다.
류현진은 동점을 허용한 상황과 관련해 "강백호와의 승부에서 첫 두 타석은 좋았지만, 마지막 대결에선 유인구성으로 던지려던 공이 실투가 됐다"며 "던지고 나서 나 자신도 '아차' 싶었는데 강백호가 놓치지 않고 잘 쳤다. 아쉬운 부분 중 하나"라고 돌아봤다. 또 동갑내기 친구인 황재균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한 데 대해서는 "이제 전쟁이 시작됐다"고 농담하면서 "다음 승부 땐 더 집중하겠다"고 웃어 보였다.
류현진은 이제 4월 4일로 예정된 롯데 자이언츠와의 대전 홈 경기 등판을 준비한다. 완벽하게 실력이 올라온 모습을 확인했으니, 더는 걱정거리도 없다. 최원호 한화 감독은 "류현진이 6이닝 동안 삼진 9개를 잡는 등 훌륭한 피칭으로 선발 투수로서의 역할을 다 해줬다. 퀄리티 있는 투구로 개막전 부진을 씻는 모습을 봤다"고 만족스러워했다. 류현진도 "내가 던지는 날 팀이 이기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선발 등판한 날은 계속 팀이 이길 수 있는 흐름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요즘 야구장에 나오는 게 정말 재미있다.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서 나 또한 (더그아웃에서나 마운드에서나) 의욕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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