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황장엽 전 비서의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을 당시의 김 씨. |
피해자 A 씨와 B 씨가 김 씨(70)를 처음 만난 건 2009년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강연장에서다. 김 씨는 1997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황 전 비서의 친서를 수차례 전달하며 그의 한국 망명을 도운 인물이다. 황 전 비서의 망명 후 김 씨는 북한민주화운동을 함께하면서 황 전 비서의 수양딸로 입적해 유일한 법적 가족이 됐고 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으며 황 전 비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왔다.
평소 강연을 들으며 황 전 비서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왔던 A 씨와 B 씨는 김 씨와 자주 자리를 만들며 친분을 쌓았다. 그 자리에는 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직원의 소개로 만난 피해자 C 씨도 함께했다. 김 씨는 피해자들에게 윤 씨(55)를 소개했다. 지인의 소개로 김 씨와는 10년 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윤 씨는 자신을 미 8군 중장의 비서라고 밝혔다.
피해자들과 친분이 쌓이자 김 씨와 윤 씨는 그들에게 투자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탈북자를 돕는 차원에서 미군이 용산 미군기지 내 100여 개에 달하는 수익 사업을 모두 나에게 맡겼다”며 “그 중 고철 수집 운반권, 육류 납품권, 매점 운영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테니 투자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옆에서 윤 씨까지 나서 투자를 부추겼다. 윤 씨는 용산 미군기지 내에서 독점으로 운영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성사만 되면 수익은 확실히 보장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피해자들은 ‘수익성이 너무 확실한 사업이라 사기가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 씨와 윤 씨는 황 전 비서의 이름을 꺼냈다. 김 씨는 “국정원에서도 미 8군이 황 전 비서에게 용역을 준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들은 황 전 비서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주저 없이 투자를 결심했다.
▲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
경찰 조사 결과 김 씨 아들 명의의 법인회사는 피해자들과의 계약을 위해 만들어진 유령 회사로 알려졌다. 그래서 김 씨의 아들 역시 사기 사건에 연관돼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김 씨의 아들은 회사 설립에 명의만 빌려줬을 뿐 이번 사기 사건에 연루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투자는 이루어졌지만 용산 미군기지 내 수익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다. 김 씨는 “조만간 다 해결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3년 동안 투자금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투자자들이 사업 진행 정도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A 씨는 “미 8군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다른 곳에 알아볼 방법도 없이 전적으로 김 씨에게 의존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윤 씨의 범행은 피해자들이 미군부대에 사업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들통 났다. 경기지방경찰청 2청 국제범죄수사대가 첩보를 입수하고 김 씨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이 미군 측에 확인한 결과 김 씨가 주장한 100여 개의 수익 사업은 전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가 피해자들과 서명한 계약서도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범행이 발각되자 윤 씨는 행방을 감췄다. 윤 씨는 이미 다른 범죄 전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미 육군 범죄수사대 조사 결과 미군 부대에서 일한 적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현재 달아난 윤 씨를 쫓고 있다.
피해자 B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투자를 한 사람이 아직 7~8명 더 있다”며 “투자 피해금도 100억 원대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김 씨가 미군으로부터 용산 미군기지 내 100여 개의 사업을 맡았다고 주장한 만큼 투자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재까진 피해자 3명만 확보한 상태고 더 확인 중이다”며 말을 아꼈다. 조사결과에 따라 피해자와 피해액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미8군 출입구.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한편 김 씨는 지난 4월 “아버지(고 황장엽 전 비서) 재산 9억여 원을 돌려 달라”며 황 전 비서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엄 씨(51)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했다. 김 씨는 “황 전 비서가 신분상 제약이 있어 직접 부동산을 계약하지 않고 엄 씨에게 9억 원을 전달해 서울 강남의 부동산 매입을 하게 했다”고 주장하며 엄 씨에게 부당이득금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김 씨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황 전 비서가 엄 씨에게 토지를 명의신탁했다고 인정하긴 어렵고 오히려 황 전 비서가 사실상 부부로 생활한 엄 씨에게 재산을 증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김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