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로비스트 박동선의 로비 절반은 조국보다는 쌀 중개권 등 자신의 이권을 위한 것이었다. 연합뉴스 |
사실 “미국에서는 누구나 로비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로비 자체는 일상적인 일이다. 저자 안치용 씨는 “문제는 로비가 아니라 의원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의 표를 매수하려는 것이다”고 대미로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일요신문>에서는 박정희 정권 당시 대미로비와 관련한 중앙정보부 비사 부분을 발췌, 2회에 걸쳐 소개한다.
▲ 고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1월 ‘자신의 목’을 따러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던 김신조 사건과 이듬해 “미국은 이제 아시아 국가에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 선언을 겪은 이후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안보위협이 현실화됨으로써 독자생존을 모색하고 동시에 대미로비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1971년 힘겹게 3선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미국의 도움 없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가면서 로비스트들을 통해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도 유지해 나갔다. 이런 로비 활동을 지휘하고 관리했던 곳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중정 요원들을 통해 은밀하게 대미로비를 이끌었던 박정희 정권이 김형욱-이후락과 같이 중앙정보부 ‘실세’들에 의해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미로비의 실체가 처음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70년대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을 지냈던 이재현(2005년 별세)의 망명이었다. 국내에서는 대미로비 폭로하면 미 청문회 참석과 회고록 발간 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비밀을 폭로했던 김형욱(제4대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재현은 김형욱보다 먼저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하고 나아가 조사위원으로까지 활동하며 박정희 정권에 비수를 꽂아 넣은 인물이었다.
도널드 프레이저 하원의원의 주도로 이루어진 미 청문회(일명 프레이저 청문회) 당시 이재현은 유신체제에 관한 반발심과 자신의 부하 직원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넣으라고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공작 행위 때문에 망명하게 됐다고 밝히면서 박정희 정권을 거세게 비판했다.
1973년 6월, 정치적 망명을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던 이재현은 미주 지역 중정 책임자인 양두원의 호출을 받는다. 당시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중앙정보부는 이재현이 혹시 망명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그를 쉴 새 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양두원은 중앙정보부의 공작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이재현을 호되게 질책했고 그는 그 길로 대사관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재현의 급작스런 망명은 미 국무부가 FBI 측에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로비 활동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설상가상 이재현의 망명 직후 김대중 납치 사건까지 터지자 미국은 더욱 한국의 중앙정보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재현의 망명은 박정희 정권에 치명타를 입힌 동시에 코리아게이트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망명 이후 웨스턴일리노이 대학 부교수로 재직했는데 이때 인연을 맺은 이가 바로 프레이저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 코리아게이트 관련 프레이저 청문회가 있기 2년 전, 이재현은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던 한 인권청문회에 참석해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며 그와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재현이 코리아게이트의 불쏘시개였다면 이후 불을 붙인 이는 재미 실업가인 박동선이다. 코리아게이트가 ‘박동선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 역시 코리아게이트의 시작이 박동선의 로비를 받던 백악관 직원의 뇌물 향응을 <워싱턴포스트>에서 보도하고, 이후 박동선의 뇌물을 받고 있던 하원의원들이 공개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박동선은 그야말로 타고난 로비스트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그의 수입은 1900만 달러에 달했고 그의 저택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저보다 큰 250여 평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교성과 리더십이 뛰어났던 박동선은 17세 때 미 유학길에 오른 뒤 조지타운대학을 다니며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이때의 인맥 형성이 훗날 대미로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박동선의 로비 활동은 조국보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이권을 위한 것이었다. 박동선은 중앙정보부 출신은 아니었지만,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중앙정보부의 지원과 지시를 받고 있었고 박 전 대통령을 최소 2번 이상 만났다.
박동선과 박 전 대통령의 첫 만남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1년에 이뤄졌다. 안 씨는 “지금까지 박정희가 박동선을 처음 만난 것은 1965년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61년이었다”라며 “이후 3선 개헌, 유신체제로 이어지면서 미 의회의 반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박동선은 로비를 통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유도했다”라고 밝혔다.
책 속에 소개된 일화들은 하나같이 로비스트 박동선이 국내 언론에 보도된 것 이상으로 ‘거물급’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6세의 나이에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띈 것을 시작으로 한인 청년 자격으로 김종필 당시 제1대 중앙정보부장의 방미 행사에 배석하고 중정 요원들과 미 상하원의원들의 만찬을 주선하기도 했다.
박동선은 같은 성씨라는 것을 이용해 박정희 전 대통령 친척으로 사칭하다 중앙정보부에서 밤샘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 인연을 쌓은 이가 바로 김형욱이었다. 이후 김형욱은 박동선의 능력을 높이 샀고 박동선을 위해 정부 외화 300만 달러의 예치 은행을 바꿔주기도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쌀 중개권을 통해 미 의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발상을 한 것도 박동선이 최초였다. 쌀 생산량이 넘치는 미국으로서는 수출을 통해 자국의 쌀 가격을 안정화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 말 쌀 중개상으로서 본격 로비 활동을 시작한 박동선은 두 달 만에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미 하원의원단의 방한을 성사시키며 능력을 과시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 3선 개헌으로 거센 역풍을 맞고 있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토머스 오닐 하원의원의 개헌지지 발언을 이끌어낸 것도 박동선이었다. 훗날 하원의장이 된 오닐 의원의 지지 발언은 3선 개헌과 관련한 국민투표가 있기 3일 전 이뤄진 것으로 한국 방문 당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3선 개헌이 통과되자마자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됐던 김형욱에 비해 박동선의 주가는 다시 한 번 높아진 셈이다.
박동선은 쌀 중개권에 대한 커미션으로 1969년 23만여 달러, 1970년 40여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그 과정에서 미 정치인들에게 100달러에서 1000달러까지 정치자금을 기부했고 중요한 의원들은 따로 관리하며 1만 달러가 넘는 현금보따리를 안기기도 했다. 박동선은 자신의 뒤를 봐 주던 김형욱이 물러난 이후 쌀 중개권을 빼앗기기도 했는데 이때 상하원 의원들을 움직여 박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 해 대통령을 움직이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박 전 대통령은 1971년의 편지 공세에 처음에는 화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박동선은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코넬리어스 갤러거 의원에게 3만 달러를 건네며 박 전 대통령을 만나줄 것을 주문했다. 결국 갤러거 의원은 이듬해인 1972년 1월 청와대를 방문했고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이던 갤러거 의원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 씨는 “이날 박정희-갤러거 간 대화는 1972년 2월 3일자 FBI 정보메모에 기록돼 있으며, 이 정보는 청와대에 대한 도청을 통해 입수된 것이 확실하다”라며 미국의 청와대 도청 사실을 최초로 폭로하기도 했다.
결국, 72년 3월 1일자로 쌀 중개권을 되찾게 된 박동선은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의원들에게 5만 달러씩 통 크게(?) 지원하는 등 더욱 강력한 로비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1972년 닉슨 대통령 재선캠프에 2만 달러 이상을 건넸다”는 대목에서는 당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70년대 말 프레이저 청문회 당시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다이어리와 문건을 살펴보면 “중정부장님 패스만(당시 민주당 하원의원)에게 준 돈 보전해 주세요” “5만 달러는 중정이 내니 10만 달러를 지출해 달라”는 등 곳곳에서 중앙정보부와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 역시 로비스트 박동선으로부터 170만에서 200만 달러 사이의 돈을 가져갔다. 미 청문회를 끝으로 로비스트로서의 전성기를 마무리한 박동선(1935년생·78세)은 현재 런던에 본사를 둔 한 무역 컨설팅 회사의 국내 지사 회장 자격으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다음 호에는 김형욱-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관련 에피소드와 박정희 정권 당시 스위스 비밀 계좌의 정체가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