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 금지에 가장 민감하다. 주요 재벌 가운데 가장 강력한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는 데다, 이 고리가 지배구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으려면 대주주 일가나 순환출자가 형성되지 않을 다른 계열사가 이들 세 회사 중 한 회사의 지분을 사들여야 한다.
언뜻 마땅한 계열사가 없어 보이는 탓에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부자가 사재를 털어 지분을 사야 하는 게 아닐까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사실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 등이 그나마 조 단위 자금을 마련할 만한 곳이지만, 각각 기아차와 현대차가 최대주주여서 지분을 매입하면 또 다시 순환출자 고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방법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바로 정의선 부회장의 자산이 있는 회사들,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엠코를 주목해야 한다.
▲ 정의선 부회장. 대선주자들이 ‘재벌개혁’을 강력히 표방하고 있어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글로비스 지분 31.88%의 가치는 2조 5700억 원 상당. 현대엠코의 상장시 시장가치는 약 1조 원으로, 정 부회장 지분율 25%의 가치는 약 2500억 원이다. 정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엠코 지분가치만 3조 원에 달하는 셈이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11.5%, 9300억 원), 엠코 지분(10%, 1000억 원)을 더하면 역시 1조 원이 넘는다. 또 올해 현대모비스 실적을 개선시키지 않음으로써 주가하락을 유도, 기아차의 현대모비스 지분가치를 떨어뜨리는 원가절감(?)의 방법도 있다. 반대로 현대글로비스의 실적을 개선시켜 주가를 부양하는 것도 가능하다.
게다가 정몽구 회장은 이미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순환출자는 깨어지고 정몽구 회장·정의선 부회장 부자가 약 25%의 지분율로 현대모비스를 지배하고, 현대모비스는 현대차를 통해 기아차를 지배하는 구도를 만들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재용 사장 부자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다시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구조와 비슷해진다. 물론 개인 돈은 별로 들지 않는다.
현대글로비스는 일찌감치 지배구조 변화의 핵으로 주목됐다. 전용기 현대증권 연구원은 “현대글로비스 주가가 30만 원까지 간다면 시가총액은 10조 원이 넘는다. 이 정도면 기아차의 현대모비스 지분과 맞교환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했다.
▲ 이건희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이건희 회장 등 최대주주는 삼성에버랜드의 경우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한 단계 내려간 삼성생명의 주주구성을 보면 이건희 회장 20.76%, 삼성에버랜드 19.34%로 50% 미만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로 가면 지배력이 15.29%로 떨어진다. 그나마도 절반가량인 7.52%는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이 가진 지분이다. 차기 정부가 금산분리를 강력히 적용하면 이 지분이 다시 5% 미만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삼성전자에 대한 이건희 회장 일가 지분율은 12%대로 추락한다. 현재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율만도 6.59%에 달한다. 여기에 국민연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다른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지분만 더해도 12%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최근 증권가에서 나오는 시나리오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에버랜드로 넘기는 방법이다. 즉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에버랜드로 넘기고, 대신 삼성에버랜드가 가진 삼성생명 지분을 자사주 형태로 취득하는 방법이다. 역시 주식 스왑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이 8조 원을 넘으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데 비해 삼성전자 주가는 그다지 시원치 않은 움직임인데, 시장에서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삼성생명과 삼성에버랜드가 각각 보유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지분을 맞교환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 7.52%의 시장가격은 약 14조 6000억 원. 삼성에버랜드가 가진 삼성생명 지분 19.34%의 시장가치는 약 3조 6400억 원이다.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 전량과 맞바꾸기엔 규모가 작지만,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에 대한 지분율을 5% 미만으로 떨어뜨리는 데는 4조 87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약 1조 원의 차이가 있지만 삼성전자 주가와 삼성생명 주가 등락에 따라 그 차이는 줄어들 여지가 있다.
삼성전자가 해결되면 다음은 다른 계열사가 문제다. 주력인 전자 계열사는 삼성전자 등을 통해 탄탄하게 지배하고 있지만 제일모직과 제일기획, 특히 준 지주사로 꼽히는 삼성물산에 대한 지배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의 삼성그룹 지분이 7.15%에 불과하며 제일기획도 삼성 측 지분율은 18.36%, 삼성물산도 삼성 측 지분은 13.77% 뿐이다.
다만 세 회사 모두 사업구조상 삼성그룹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또 시가총액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10조 원 미만, 제일기획은 2조 원 중반에 불과하다. 상황에 따라 지분율을 높이더라도 자금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