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등기부 안 뗀 원고 책임도” 60%만 반환…중개사협 손배소 거니 “1억 공제금 나눠가져라” 산 넘어 산
#소송비 40% 내고, 보증금은 60%만 반환
5월 1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94단독 최정윤 판사는 서울 관악구에서 6년 전 발생한 전세사기 사건의 한 피해자가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 등을 상대로 2023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임차보증금 1억 5000만 원의 60%인 9000만 원을 원고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비용의 경우 "40%는 원고가 내라"고 주문했다.
피해자로서는 떼인 보증금도 온전히 돌려받지 못한 데다 소송비 부담까지 가중된 셈이다. 이 사건 피해자는 50명에 달한다. 2022년 말쯤부터 신고가 접수돼 아직도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사례가 더 있다. 동일한 사건에서는 유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같은 부담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2018년 5월 발생한 이 전세사기 사건은 범행 가담자가 5명으로 파악된다.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무소 대표 A 씨, 이 사무소에서 일하는 또 다른 공인중개사와 보조직원 2명 등이다. 이들 가운데 범행을 주도한 집주인과 적극 동조한 공인중개사 및 보조직원 총 4명은 2023년 6월 사기 등 혐의로 최대 징역 8년 6개월 등을 선고받았다.
이번 재판의 피해자는 현실적으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쪽이 A 씨뿐이라는 판단에 그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는 보증금이 1억 5000만 원인 전셋집에 들어갔는데, 실소유주와 명의가 다른 집이었다. A 씨의 사무소 직원들은 이를 ‘신탁부동산’이라고 속여 피해자의 전세계약을 유도했고, 집주인 등은 보증금만 챙긴 채 달아났다.
법원은 A 씨가 '공인중개사로서 신의 성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중개 업무를 책임져야 할 당사자였음에도 중개물의 권리관계를 분석하고 고객에 충실히 설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업무 상당 부분을 직원들에 전적으로 일임해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등기부를 떼지 않은 대가
문제는 피해자의 일부 미흡한 점도 판결에 반영됐다는 점이다. 법원은 "원고도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며 부동산 등기사항 증명서 등을 발급받으면 쉽게 이 사건 부동산의 권리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며 "이를 확인하지 않은 점에 비춰보면 피고의 손해배상책임은 임차보증금 액수 60%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결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해당 사건 피해자 약 50명의 상당수는 20~30대 청년들이다. 부동산 거래에 서툰 청년들 입장에서 등기부 확인이 정말 간단한 절차였을지, 만일 확인했더라도 등기된 각각의 사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분석할 수 있을지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범행 일당은 전세매물이 '신탁부동산'이라고 강조하며 임대인의 신뢰를 보증할 '약속어음 공정증서'도 작성해주겠다고 계속 강조했다. 일반적인 부동산 거래 때는 거론조차 안 되는 개념으로, 사회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을 골라 일종의 교란 작전을 펴 피해자들을 기망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게다가 집주인 등에 대한 형사재판의 유죄 판결문을 보면, 일부 피해자들은 등기부를 확인하고도 속았다. 공인중개사 직원들이 공정증서 작성을 약속하며 계속 신뢰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이 직원들은 정작 '신탁부동산 임대차 계약은 신탁회사의 사전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고지하지도 않았다.
이에 형사재판을 진행했던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9단독 채희인 판사는 "피고인들은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피해자들을 상대로 개괄적인 설명을 이어가며 기망행위를 벌였다"면서 "피해자들은 주택임대차보호법 등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줄로 믿었다"고도 지적했다.
이번 민사재판 소송에서 피해자 측 법률대리를 맡은 전범진 변호사 역시 "피고 측 책임이 더 크게 인정되긴 했어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며 "신탁부동산이든 등기부든 개념이나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과실이 40%씩이나 된다고 판단한 지점은 지나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공제금으로 받아라' 판결…또 소송 제기해야
또 다른 문제도 있다. 피해자는 A 씨와 함께 한국공인중개사협회를 대상으로도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는 '기각'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유가 눈길을 끈다. 법원은 'A 씨가 본인 과실 등으로 고객에 피해를 입힐 경우를 대비해 해당 협회와 1억 원짜리 공제계약을 맺었다'며 이 금액으로 충당하라고 주문했다.
여기서 1억 원은 '피해 사례별' 기준이 아닌 '1년 총액'이다. A 씨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세입자는 현재까지만 3명이다. 이 역시 수사나 재판이 더 남아 있는 까닭에 피해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1억 원을 나눠 가져야 할 인원이 그만큼 증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부동산 업계에서 개인 공인중개사와 한국공인중개사협회의 공제계약은 흔하다. 일반적인 보험처럼 한 공인중개사가 일정 금액을 협회에 내면, 협회는 이를 적립하다 공인중개사 과실로 고객에 손해 등 문제를 일으켰을 때 공제금액만큼 배상을 대행해주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공제계약금 한도에 관한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나마 국토교통부가 공인중개사법 시행령을 개정하며 2023년 1월 이후 개인 공인중개사의 최소 공제금을 기존 1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올렸고, 최대 금액을 3억 원까지 설정했으나 아직 부족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 국토교통부가 2023년 6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 전세사기에 가장 많이 가담한 이들은 공인중개사·중개보조원(414명, 42.7%)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이은 임대인(264명, 27.2%)을 압도한 데다, 통상 한 곳의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여러 피해자가 발생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2억~3억 원의 공제계약금 한도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공제금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피해자라도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문제가 있다. 이번 A 씨 사건의 피해자는 법원에 또 '공탁 출급청구권 확인의 소'를 제기해야만 한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법원에 공탁한 A 씨 공제금을 받아야 할 자격과 다른 이들과의 분배 비율 등을 정하는 절차다.
전범진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알아서 나눠 갖는 자체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이마저도 확정 판결문 등을 지참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만 소 진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기도 힘든 현실인데,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법적 절차까지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착잡할 따름"이라고 털어놓았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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