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협 업무 여건 개선 요구, 조 청장 “법령상 검토 불가”…“청장 태도 문제” vs “직협이 선 넘어”
#현안 검토도 않고 "점심 약속…" 찬바람
서울의 31개 경찰서 소속 경찰직장협의회(직협) 회장단은 5월 23일 오전 10시 서울경찰청에서 조지호 서울청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직협은 경찰에서 사실상 노조 기능을 하는 곳으로, 경정 이하 일선 경찰관들로 구성됐다. 직협과 기관장의 현안 논의는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관례에 따라 전국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번 간담회는 조 청장 취임 이후 약 4개월 만에 처음 열린 자리라 서울 현장 경찰관들의 관심이 컸다. 이에 서울청 산하 직협들은 미리 현장 의견을 수렴해 '업무 여건 개선'을 뼈대로 한 15개의 안건을 정리해 서울청에 전달했고, 조 청장이 원론적 형태로나마 답변을 내놓을 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 내부망인 '현장활력소'와 현직 경찰만 가입 가능한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에는 해당 간담회 직후 조 청장의 무성의한 모습을 비판하는 글들이 잇따라 게재됐다. 서울의 직협 대표단은 이례적으로 청장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내부에 입장문까지 냈다.
이 같은 상황은 조 청장이 직협 측에서 미리 전달한 안건들을 일체 검토하지 않고 참석한 데서 불거졌다. 직협은 약 2주일 전인 5월 초쯤 서울청에 현장 업무 및 근속 관련 애로사항을 전달했으나, 조 청장으로부터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에 간담회는 경색된 분위기가 이어졌다고 한다.
애초 직협은 허심탄회한 소통을 위해 오후 행사를 요구했지만, 조 청장 측의 결정으로 오전 행사가 열렸다. 간담회는 1시간 남짓 진행됐는데 조 청장의 인사말이 약 30분, 그 뒤로 양측의 의례적인 대화가 30분쯤 이어지던 중 조 청장이 "다른 점심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뜨면서 끝이 났다.
당시 자리에 참석한 한 경찰관은 "직협과 청장과의 만남이 법적 의무는 아니라지만 너무 심했다"며 "지휘부와 현장 경찰관들이 특정 사안에 관한 의견 차이로 부딪힌 적은 몇 차례 있었어도, 청장의 태도가 공론화하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런 식이면 앞으로는 소통 방법마저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듯싶다"고 했다.
실제 서울청 직협 대표단도 "이번 간담회를 통해 지휘관의 인식과 성향이 직협과의 소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현실을 알게 됐다"며 "경찰 관리자가 평가를 통해 하위 10%를 걸러내듯, 우리도 지휘관의 소통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내부망을 통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일부 경찰관들은 조 청장이 인사말을 통해 "국민을 위한 직협이 돼라"고 강조한 지점도 문제로 꼬집는다. 직협 한 관계자는 "경찰에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직협은 법적으로 노조 설립이 금지된 공무원들의 근무환경·고충 개선이 목적임을 감안하면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지방청은? "안건 일일이 논의"
이 소식을 접한 수많은 일선 경찰관들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현장활력소에는 관련 글이 오르자마자 수십여 개 댓글이 달렸다. 거의 지휘부의 소통 역량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지역의 직협 관계자들이 각자 속한 지방청의 간담회 방식을 소개하며 경찰 조직의 사실상 '넘버2'로 꼽히는 조 청장을 우회 비판하기도 했다.
한 경찰관은 "4개월을 기다리고 빈손으로 만난 간담회였다"며 "경찰 공무원은 국민에 봉사하는 자리지만, 동시에 제복 입은 시민이기도 한데 지휘부가 조직원도 존중하지 않은 채 무한 희생만 강조한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경찰관은 "현장 경찰관과의 만남이 무늬만 갖출 게 아니라 내실을 갖춰 성의껏 소통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지방청과 비교하는 내용에서는 부산의 한 경찰관이 "(우철문) 부산청장께선 직협과 꾸준히 간담회를 갖고, 각 안건에 대해서도 일일이 소통하며 이견이 있으면 예정 시간을 넘긴 채 치열하게 토론까지 한다"며 "직협과의 소통은 각 시·도경찰청장이 소통의 의지만 있다면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경남의 한 경찰관도 2023년 12월 진행한 지방청장과 소속 경찰서 직협 회장단 간담회를 소개하며 힘을 보탰다. 그는 "(김병우) 경남청장께서는 직협 대표단이 전달한 안건들을 하나하나 새겨듣고, 웬만하면 통과될 수 있도록 지시했다"며 "지방청장께서 안건에 대해 준비를 많이 해와 일일이 답변까지 해줬다"고 전했다.
논란은 현직 경찰만 가입 가능한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까지 번졌다. 하루 만에 글과 댓글이 100여 개 이어졌다. 여기서는 조 청장이 다음 경찰청장으로 유력하다는 세간의 분석을 반영한 글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14만 명을 지휘하는 경찰청 본청 청장이 되면 크게 우려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블라인드에서 한 경찰관은 "조 청장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다. 길게 말은 못하겠지만, 죽겠다"며 여운을 남기는 글을 쓰기도 했다. 조 청장은 경찰 안팎에서 '기획통'으로 불린다. '원칙주의자로서 조직 장악력이 뛰어난 인물'이란 평가가 많다. 카리스마를 갖췄다는 인상이 짙지만, 다소 경직된 면모를 지녔다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조지호 "소통은 OK, 협의는 NO"
서울 직협 대표단은 서울청에 현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향후 간담회 방식 개선 등을 요구하는 입장을 전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관계자는 "조 청장이 법에 따른 운영을 강조했는데, 저희로서도 직협법 개정을 통해 시·도경찰청장과 대표단 간담회의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고 꼬집었다.
조 청장도 이러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직협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확고하다. 오히려 직협의 요구를 들어주는 자체가 법령에 맞지 않고, 직협이 '선을 넘었다'는 입장이다. 직협과 안건을 협의하는 주체는 각 경찰서 서장들일뿐, 지방청장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조 청장은 일요신문에 "법은 직협 구성원들이 근무여건 개선 및 고충처리 등의 안건으로 소속기관의 장과 1년에 두 번씩 협의를 하도록 돼 있다"면서도 "이들은 경찰서 단위로 구성된 직협인 만큼 지방청장이 아닌 경찰서장과 협의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이번 간담회를 진행한 이유는 참석자들이 각 경찰서의 현장을 대표하는 직협 회장들인 만큼, 지방청장으로서 힘을 실어주려는 취지"라며 "이를 바탕으로 직협 회장들이 각 경찰서 서장들과 협의에 임할 때, 서장들이 책임감 내지 무게감을 갖고 직협 구성원들의 말을 경청하라는 메시지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조 청장은 또 "서울의 직협 회장단이 입장을 내고, 일선 경찰관들이 비판에 동조하는 데 대해서는 자유로운 의사 표시로 이해하고 있어 달리 할 말은 없다"며 "직협과 지방청장의 안건 협의가 법의 허용 범위를 넘어선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소통 차원의 간담회라면 앞으로도 언제든 진행할 의사가 있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일선 경찰관들은 조 청장의 뜻에 공감할 수 없다는 기조가 뚜렷해 분위기가 어둡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경찰관은 "조 청장 말대로라면 2019년 이용표 서울청장부터 전임자인 김광호 청장까지 위법을 저질렀다는 뜻인가"라며 "다른 지방청 역시 청장과 각 경찰서 단위 직협 회장단의 현안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이 경찰관은 그러면서 "일선 경찰관들은 누구한테 문제를 건의해야 하냐"며 "최근 간담회에서도 작은 사항이지만 즉석에서 거론된 몇몇 경찰서 시설 문제는 조 청장도 개선을 약속했는데, 이는 어떻게 약속했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협의든 소통이든 단어에 집착할 게 아니라 대화에 의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례에 따라 이뤄져 온 직협과 지방청장의 안건 협의는 조 청장의 행보를 계기로 가능한지를 놓고 다시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일요신문은 조 청장에 앞서 최근 간담회를 준비한 서울청 측에도 질의를 남겼는데, 서울청 측은 "청장께서 여러 업무로 바빠 직협 안건을 검토하지 못했다"며 "다음엔 같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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