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격 3관왕을 달성한 넥센 히어로즈의 박병호를 만나 ‘만년 유망주’에서 팀의 붙박이 4번 타자로 되기까지 그의 야구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생애 최초의 MVP 발표를 앞두고, 박병호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만났다.
―도대체 올 시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4시즌 동안 24홈런, 9도루, 81타점에다 타율도 0.191이었다. 그런데 한 시즌 만에 4시즌을 모두 합한 기록을 통째로 바꿔놨다.
▲나조차도 올 시즌 이렇게까지 좋은 성적을 내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주위에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성적을 낸 배경에는 김시진 전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의 헌신적인 도움과 아내의 내조, 그리고 이장석 대표님이 날 LG에서 넥센으로 트레이드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답변이 어째 ‘방송용 멘트’로 흐른다(웃음). 시상식장 아니니까 편하게 답해 달라. 올 시즌 눈에 띄는 성적 중에서 ‘도루(20개)’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시즌 최다 도루가 5개(2010년)였는데 올해는 ‘호타’에다 ‘준족’까지 장착했다.
▲아마추어 시절 체격에 비해 달리기를 잘했다. 그래서 도루하는 걸 즐겨했지만 프로 들어와선 기회가 없었다. 아니 아예 도루할 엄두조차 못냈다. 그러다 올 시즌을 앞두고 강정호랑 내기를 했다. 누가 먼저 도루 10개를 달성하는지. 그런데 한두 개씩 도루가 늘어나더니 20개까지 나오더라. 내 도루가 먹힌 이유는 포수들이 ‘설마 박병호가 도루를 하겠나’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염경엽 감독님도 지난해 코치 때 주루에 대한 가치관을 바뀌게끔 만들어주셨다. FA가 됐을 때 홈런만 치는 타자랑 홈런에다 도루도 잘하는 선수랑은 몸값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얘기해주셨다. 그런 현실적인 조언들이 야구를 대하는 자세를 바꿔놓더라.
―‘20(홈런)-20(도루)클럽’ 달성 욕심 때문이었는지 19개 도루를 성공시킨 이후에는 도루사가 3개나 나왔다.
▲그러게 말이다. 이상하게도 19개 이후부터는 도루 사인이 나와도 스타트가 잘 안 됐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도루 욕심으로 내달리다가 아웃되고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김성갑 감독대행님을 찾아가 안 뛰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김 감독대행님은 ‘프로는 기록이다. 찬스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기회가 나면 사인 줄 테니까 자신있게 뛰어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셨고 도루 기록을 세우시길 바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트레이드 자체가 기뻤다고 했지만 당시에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LG에 이어 넥센에서도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가지는 않았나.
▲그해 12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LG에 잔류하게 되면 아내한테 멋진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쯤 변화를 갖고 싶었다. 물론 LG 2군 시절 김기태 감독님께서 정말 열심히 가르쳐주셨다. 그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못해 항상 죄송했는데, 내가 넥센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니까 그 또한 보기 좋다고 격려해주시더라. 내가 감독님 복이 많은 것 같다(웃음).
―LG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이 아픔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군 복무를 한 2년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의 대부분이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 당연히 1군보다는 2군에서 지낸 시간들이 많았고….
▲처음 LG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언론에서는 ‘슈퍼루키’라느니 ‘유망주’라느니 하는 단어로 날 포장해줬다. 기분 좋았다. 그러다 2년차 때 입대를 했다. 그렇게 해서 2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팀으로 복귀해보니 어느새 내 밑에는 후배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때부터는 ‘유망주’가 아닌 ‘만년 유망주’라는, 완전 다른 색깔의 이미지가 날 따라다녔다. 점차 자신감이 떨어졌고 2군에서 지내며 얼굴 표정도 어두워졌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군에선 최고의 성적을 냈다. 하루 빨리 1군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1군에만 올라가면 2군 때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왠지 1군의 그라운드가 훨씬 더 커 보였고 투수들도 2군 선수들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즉 실력 차이가 컸던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위축됐던 마음들이 자신감 없는 플레이로 나온 모양이다.
―부모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동창이시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회에는 꼭 참석하시는 편인데 한번은 아버지가 나한테 동창회 나와 인사나 하고 가라는 얘기를 하시더라. 그래서 그 동창회를 찾아갔고 아버지 친구 분들과 얘기를 나누는데, 한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병호야, 네 엄마 아빠가 LG에 입단했을 때는 얼굴 표정도 밝고 친구들 앞에서 네 자랑을 많이 했는데 요즘엔 통 네 얘기도 안 하고 야구 보러 가자는 말도 안 한다. 네 부모의 어깨가 펴지게 하려면 네가 야구 잘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하시는데 정말 마음이 쓰라렸다. 그랬던 부모님이 올해는 아예 야구장에서 사셨다(웃음). 친구분들을 대동해서 표 사가지고 입장하신 후 열심히 응원하신 뒤 돌아가신다. 내가 야구 잘하는 게 최고의 효도인 셈이다.
▲ 박병호가 지난 6월 13일 끝내기 안타를 친 후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
―결혼 후 야구 인생의 꽃을 피웠으니 아내의 내조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정규시즌 MVP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는가.
▲솔직히 아직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수상은 물론 내 이름이 그런 어마어마한 자리에 올라 있다니…. 만약에 상을 받게 되더라도 실감나지 않을 것 같다. 나보다는 선수들이 더 많이 좋아해 준다. 다른 팀 선수들까지. 아마 내가 걸어온 인생 스토리가 조금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어서인가 보다. 설령 받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드린다.
―박병호 선수가 MVP 후보에 오르는데 어느 투수의 희생이 컸던 건가(웃음).
▲음, 아무래도 SK 윤희상 선수한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희상이 형한테 홈런 3개를 뽑아냈을 것이다. 그 형이 멋진 건 홈런을 친 다음날 경기장에서 만나면 날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준다. 형의 그런 배려에 내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류현진 선수가 메이저리그 포스팅에 나왔다. 어떤 기분인가.
▲처음에 그 소식 듣고 만세 불렀다(웃음). 아마 나 말고도 현진이가 미국으로 떠나는 데 대해 ‘진심으로’ 좋아했을 타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선수로서는 정말 부러운 부분이고, 넥센 타자로서는 축하를 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런 심정인 것 같다.
―WBC 대표팀에서 뛸 확률이 어느 정도라고 보나.
▲프로 입단 후 단 한 번도 대표팀 유니폼을 입어 본 적이 없다.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1루수에 정말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 ‘감히’ 욕심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 선배 등 해외에서 이름을 날린 선수들이 많은데 과연 박병호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나 싶다. 큰 욕심 내지 않고 기다려 보겠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장교 출신 며느리와 시아버지 ‘호흡 척척’
박병호와 이지윤 부부는 아내가 4년 연상이다. 두 사람은 박병호가 LG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르내릴 때 만났고 박병호가 2011년 7월 넥센으로 트레이드된 후 그 해 12월 웨딩마치를 올렸다.
이지윤 씨는 한화 이글스 김태균과 결혼하면서 퇴사한 김석류 전 아나운서를 대신해 KBS N스포츠 <아이러브 베이스볼>을 진행해 오다 공교롭게 그 또한 야구 선수와 결혼하게 되면서 방송에서 하차했다. 이지윤 씨는 스포츠 아나운서 이전에 육군 중위 출신으로 더 화제를 모았다. 야구선수를 남편으로 맞이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을 떠나 있다가 홈쇼핑에서 쇼호스트와 MD로 활약했지만 지금은 전업주부로 만족하며 내조에만 전념하고 있다.
박병호는 아버지가 대위 출신이라 중위 출신인 며느리랑 호흡이 척척 맞는다고 자랑한다. “두 사람이 곧잘 군과 관련된 얘기를 꺼낸다. 몇 사단이 어떻고 사단장이 어떻고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상무 출신인 난 자연스레 소외된다(웃음). 아내가 예비군 훈련 홍보 영상물에 나온다고 하는데 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끔 선수들이 ‘오늘 훈련 때 제수 씨 화면으로 봤다’며 문자를 보내오곤 한다.”
박병호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세울 게 없었던 자신을 ‘용하게’ 알아보고 결혼까지 결정한 아내의 남다른 ‘선구안’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이런 말을 곁들인다. “요즘 아내가 종종 큰소리친다. 자신이 사람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들도 수두룩했는데 그들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연봉 5000만 원도 안 되는 선수랑 결혼을 했으니 아내 주위에선 얼마나 말들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아내가 당시 지인들에게 ‘결혼해서 내 남편을 억대 연봉선수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장담했다고 하더라. 결국엔 내년에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