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요금 인상 문제 등으로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김중겸 한전 사장이 취임한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자진 사퇴했다. 이종현 기자 |
김중겸 한전 사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마치 지난해 5월 김 전 사장이 현대건설 사장직에서 물러났던 것과 흡사하다. 당시에도 김 전 사장은 3월 주주총회에서 공동대표이사로 선임됐음에도 두 달 만에 전격적으로 자진 사퇴했다.
비록 시기상 갑작스럽게 보이지만 김 전 사장이 한전 사장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김 전 사장은 경북 상주-고려대-현대건설 출신으로 ‘MB맨’으로 분류돼 취임 전부터 자격 논란에 휩싸였다. 취임 후에는 전기요금 인상 문제로 줄기차게 정부와 대립했다.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전기요금 두 자릿수 인상을 추진하는가 하면, 정부기관인 전력거래소 등을 상대로 무려 4조 원대의 소송을 제기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 같은 이유로 지난 9월 이미 정부 쪽에서 김 전 사장 교체설까지 흘러나왔다. 정부 방침에도 아랑곳없이 전기요금 두 자릿수 인상을 고집하고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공기업 사장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처사라는 이유에서다. 또 현 정부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한전 사장에 임명한 취지를 김 전 사장이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전임 김쌍수 사장의 실패를 경험한 정부가 또 다시 민간기업 사장 출신을 공기업 사장에 임명한 것은 현대건설에서 쌓은 김중겸 전 사장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하려는 면도 있었다. 정부가 중점을 둔 원전사업과 그것의 해외 수주에 김 사장이 힘을 쏟아달라는 의미도 있었던 것. 전자회사(LG전자) 출신인 김쌍수 전 사장보다 건설회사 출신인 김중겸 사장이 훨씬 유리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해외사업 면에서 김중겸 사장이 한 일이라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굵직한 수주는커녕 되레 현 정부 최대 역점사업 중 하나인 터키 원전 사업마저 좌초 위기에 몰렸다. 해외사업을 문의할 때마다 한전 측은 번번이 “다양한 경로로 추진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해왔다.
그렇다고 국내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다. 자구 노력은 게을리한 채 틈만 나면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데만 힘썼고 자회사들을 압박해 더 많은 배당금을 챙겨가려 했다. 또 송전탑 건설 문제로 밀양지역 주민들과 큰 마찰을 일으켰다. 취임 직후 밝혔던 “국내 사업은 철저히 공익성, 해외사업은 수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외침을 스스로 무색케 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도 김 전 사장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위조부품 사용 문제로 영광원전 5·6호기 가동이 중단된 가운데 설상가상 영광원전 3호기에 균열이 발견돼 가동이 중단됐다. 당장 올 겨울 ‘블랙아웃(대정전 사태)’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지난해 내정자 신분으로 블랙아웃을 운 좋게 피해갔다고 하지만 올 겨울에 만약 블랙아웃이 또 일어난다면 현직 사장으로서는 상황을 피해갈 수 없다.
블랙아웃도 대비하지 못하면서 전기요금 인상에만 혈안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 뻔하다. 특히 올 겨울은 사상 초유의 혹한이 예고된 만큼 전기사용량이 어마어마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정부 쪽에서 ‘강제로 전기를 끊겠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표는 즉각 수리했지만 정부도 부담스러운 입장이다. 현 정부의 남은 임기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수 개월짜리 단명에 그칠지 모르는 데다 올 겨울 험난한 시간을 꿋꿋이 견디려는 적절한 인물이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 쪽에서는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취임 전부터 사의를 표명한 후까지, 김중겸 전 사장의 한전은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