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행 국정감사 현장. 한국은행은 출신 국회의원이 없어 국정감사 때 사소한 부분에까지 질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요신문DB |
한국은행에서 대선의 향방을 점치는 수준은 시중 필부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는 정도에 불과하다. 대선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기업 투자나 고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서민이나 중소기업 대출을 강화해야할지, 증시가 출렁거릴지, 아니면 대거 인사이동이 생길지 고민하는 재계나 정부부처, 공기업과 달리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곳인데도 한국은행이 이처럼 대선에서 ‘초탈’해 있는 것은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한국은행 총재 임기 보장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 제3조에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하여야 하며,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한국은행은 과거 압축 성장 시절 정부의 일개 산하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본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기업들에게 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자본 공급은 고성장이라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연 10%대가 넘는 물가 상승률이라는 역효과도 낳았다. 물가 안정을 최대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은행의 현재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은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리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행은 통화정책 기관으로서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한국 정부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IMF(국제통화기금)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고 통화관리 목표를 물가안정으로 명확히 한다’를 금융지원의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은행은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는 총재 임기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국은행법 33조 2항에 따르면 ‘총재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IMF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전까지 이 4년을 채운 총재는 구용서 1대 총재(1950년 6월 5일∼1951년 12월 18일)부터 20대 이경식 총재(1995년 8월 24일∼1998년 3월 5일)까지 20명 중 단 2명에 불과했다. 2대 김유택 총재가 5년(1951년 12월 18일~1956년 12월 12일)간 재임했고, 17대 김건 총재가 4년(1988년 3월 26일~1992년 3월 25일) 재임했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한국은행 총재의 목이 왔다 갔다 한 셈이다.
그러나 IMF의 요구로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확고해진 이후로는 4년 임기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21대 전철환 총재(1998년 3월 6일∼2002년 3월 31일), 22대 박승 총재(2002년 4월 1일∼2006년 3월 31일), 23대 이성태 총재(2006년 4월 1일∼2010년 3월 31일)는 모두 4년 임기를 채웠다.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이성태 총재의 경우 성장을 중시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와 갈등을 겪었지만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건물. 박은숙 기자 |
이처럼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총재 임기 보장은 대선 향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하고 있지만 단점도 가지고 있다. 한국은행 직원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탓에 한국은행 출신 국회의원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은행과 앙숙(?)인 기획재정부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19대 국회의원 중에서 새누리당의 경우 류성걸(기획재정부 차관)과 김광림 의원(재정경제부 차관), 민주통합당 김진표(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 이용섭(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장병완 의원(기획예산처 장관) 등 기획재정부 간부 출신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임태희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의장도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는 국회에서의 대우가 다르다. 국정감사나 대정부 질문에서 국회의원들에게 질책을 받더라도 강만수 전 장관처럼 크게 설화를 일으키는 인물만 아니면 기획재정부는 큰 문제없이 넘어간다. 강만수 전 장관에 대한 질책도 정책적인 분야에 집중됐다. 반면 한국은행은 사소한 일까지도 국회의원들에게 질책을 받는다.
또 다른 한국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한국은행에 단독조사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한국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할 때 기획재정부가 반대를 했는데 당시 기획재정부의 경우 자기 부처 출신 의원들을 상대로 강력한 설득작업을 펼쳤다. 반면 한국은행의 경우 의원들에게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기획재정부처럼 대변해줄 만한 의원들이 없어 고생을 했고, 결국 단독 조사권이 무산됐다”면서 “기획재정부는 국회에서 돌아가는 일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반해 한국은행은 항상 한발 늦는다. 한국은행 출신 국회의원이 없다는 것이 고생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