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온열질환으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 발생…‘폭염 취소’에 일부 경기 시간 조정
KBO리그 규정 27조에는 '하루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경기를 취소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날 경기 장소인 울산에는 14일 연속 폭염 특보가 내려진 상태였고, 오후 기온도 섭씨 35도를 훌쩍 넘어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됐다. 2015년 KBO가 폭염 규정을 제정한 이후 실제 이 조항이 적용돼 경기가 열리지 못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KBO 관계자는 "울산 문수구장에는 인조 잔디가 깔려 있다. KBO 경기 감독관이 온도계로 측정해 보니 복사열로 인해 섭씨 50도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폭염 경험한 감독들 "경기 강행 무리"
이날이 끝이 아니었다. 이틀 뒤인 8월 4일 오후 5시로 예정됐던 울산 롯데-LG전이 또 취소됐고, 같은 시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두산 베어스-키움 히어로즈전도 폭염으로 순연됐다. 사흘 사이에 총 3경기가 기온 문제로 열리지 못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날(8월 3일) 폭염 경보에도 경기를 강행했다가 야구장을 찾은 일부 관중이 온열질환으로 관람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두산 관계자는 "3일 키움전에서 관중 5명이 온열질환을 호소했고, 이 중 4명은 119에 신고한 뒤 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며 "구단에서 파악한 환자만 5명일 뿐 더 많을 수도 있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의 상태는 확인이 어려웠고, 의무실에서 도움을 받은 환자는 호전돼 귀가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구장도 다르지 않았다. 울산에서 경기를 치른 롯데 관계자는 "3일 LG전에서 관중 한 명이 구단에 온열질환을 호소해 의무실에서 의무 조처를 했다"고 전했다. 삼성 라이온즈 관계자도 "3일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울산 경기만 폭염으로 취소됐던) 2일 대구 SSG 랜더스전에서 온열질환 환자 4명이 나와 모두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했다.
감독들도 무더위로 인한 선수들과 관중의 건강에 우려를 표현했다. 본의 아니게 역대 최초의 '폭염 취소'를 두 차례나 경험하게 된 염경엽 LG 감독과 김태형 롯데 감독은 "8월 2일과 4일뿐 아니라 3일 경기도 취소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형 감독은 "무리하게 경기를 강행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행하려면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날씨는 누구 하나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선수뿐 아니라 관중도 그렇고, 진행요원들도 그렇다"라고 강조했다.
경기 감독관과 직접 대화를 나눈 염경엽 감독도 "프로야구는 첫 번째가 팬, 두 번째가 선수다. 팬들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러 온다. 선수는 경기장에서 팬들을 위해 100%의 힘을 쏟으면서 뛸 수 있는 야구장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며 "이런 날씨에도 경기를 하면 나는 선수들에게 '슬라이딩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외야와 내야 모두 다이빙캐치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경기 승패보다 부상을 막는 게 중요한 시기다. 지금 다치면 피해가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염 감독은 또 "울산, 포항, 청주 등 제2 구장들은 인조잔디가 깔려 있어 더 덥다. 이런 곳에서는 물을 뿌려도 한계가 있으니, 4월과 9월에 경기를 해야 한다"며 "경기가 밀리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상황이 안 되는데 경기를 계속 하는 것도 이상하다. 선수들이 불안해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잠실구장의 두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이승엽 두산 감독은 "정말 너무 덥다. 선수들이 탈진할까 봐 걱정된다"며 "나도 밖에 20분 정도 서 있었는데도 진짜 덥다는 걸 느꼈다. 지난해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대단한 더위"라고 혀를 내둘렀다. 홍원기 키움 감독도 "이미 1주 정도 전부터 우리 팀과 다른 팀 선수 모두 훈련 때나 경기 때 힘들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일사병이 우려돼 일시적으로 경기 전 훈련도 안 하고 있다. 이 환경에서는 훈련 자체가 의미가 없다"며 "기온 변화를 고려해서 경기 시간을 조정하거나 유동적으로 상황에 맞게 (강행이나 취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선수도 선수지만, 팬분들도 무척 더울 테니 건강이 걱정된다"고 제안했다. 홍 감독은 실제로 팬들이 쓰러지기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굳은 얼굴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팬분들의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시돼야 한다"며 "선수들이야 KBO 소속으로서 규정에 따라야 하지만, 더 안전한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6년 전 선수협 요청에도 무산된 폭염 취소
실제로 KBO의 폭염 취소 기준은 두루뭉술한 편이다. '최고 기온 섭씨 35도'라는 특정 기준선이 있지만, 지열이 더해진 선수들의 체감 온도는 이보다 훨씬 높을 때가 많아서다. 8월 4일엔 잠실 1루 쪽 더그아웃에 설치된 온도계의 수은주가 섭씨 50도까지 치솟는 장면도 포착됐다. 그러나 현재로선 사실상 경기 감독관의 판단에 의존해 폭염 취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기감독관도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섣불리 경기 취소 여부를 가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실제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결정이 나오기 일쑤다.
이 때문에 지난 2018년 7월에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KBO에 "7월 31일과 8월 1일 이틀간 예정된 경기를 취소해줄 것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그해 한국은 기상 관측 111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을 찍는,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루 최저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초열대야' 현상도 나타났다. 결국 선수협은 10개 구단 선수들의 의견을 취합해 "폭염이 지속될 경우 경기 개시 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방안도 고려해 달라"는 요구도 했다. 7월 31일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랐고, 8월 1일엔 최고 39도에 이를 것이라는 예보가 나온 뒤라서다. 당시 선수협 관계자는 "시즌 초 미세먼지로 경기 취소를 한 것처럼 폭염에도 선수보호 차원에서 전향적으로 경기 취소를 검토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KBO와 현장 지도자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당시만 해도 "더위를 이유로 1군 경기를 취소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KBO 관계자는 "폭염 관련 대책은 계속 고민하고 검토하는 부분이지만, 당일이나 하루 전에 경기 일정을 갑자기 취소하기는 어렵다"며 "입장권 판매나 TV 중계 문제, 각 구장별 상태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7~8월 시점의 경기 취소는 (순위 싸움에 한창 민감한 시기인) 각 팀 경기 일정이나 향후 일정 재편성에도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한 감독도 "경기 개시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것까지는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경기 취소는 옳지 않은 것 같다"며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종목이 아니다. 매일 경기를 치른다는 게 힘들지만 훈련량 조절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고 선수협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또 다른 감독들은 아예 경기 시작 시간을 늦추는 안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어차피 경기가 끝난 뒤 밖으로 나가도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훅 올라온다. 시간을 조금 늦춘다고 큰 효과는 볼 것 같지는 않다", "경기를 늦게 시작하면 그만큼 끝나는 시간도 늦어진다.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불편해진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경기 시간을 늦췄다
그 후 6년이 흐르는 사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감독들도, 선수들도, 관중도 점점 더 폭염과의 싸움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분위기다. 당시 감독들은 경기 취소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감독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경기를 취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KBO는 고육지책을 마련했다. 세 차례 경기 취소에도 폭염 특보가 끝나지 않자 8월 6일 "일부 경기 시간을 조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혹서기로 분류된 7~8월 KBO리그 경기 개시 시간은 평일 오후 6시 30분, 토요일 오후 6시, 일요일과 공휴일 오후 5시다. 그러나 KBO는 8월에 남아 있는 일요일 경기와 광복절인 15일 경기 시작 시간을 모두 오후 6시로 한 시간씩 미뤘다. "최근 무더위가 이어지고 폭염 특보 등이 발령하면서 관중과 선수, 현장 요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지붕이 있어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척스카이돔 경기만 예정대로 15일 오후 5시, 25일 오후 2시 시작을 유지하기로 했다. 10개 구단과 긴급히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폭염의 기세가 당분간 이어질 게 뻔한데, 잔여경기 일정상 계속 경기를 취소할 수도 없으니 조금이라도 선수와 관중이 더위의 영향을 덜 받게 하자는 취지다.
염경엽 감독도 이미 경기 시간 조정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염 감독은 "오후 6시 30분 경기의 고정관념을 깨고 7~9월은 오후 7시에 경기를 시작하는 대안도 고려하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했고, 경기 시간이 조정된 후엔 "일요일과 공휴일 경기 시간을 늦춘 건 대찬성"이라며 반겼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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